인재 집어삼키는 의대광풍…킬러문항 배제에 직장인도 뛰어들어
◆ N수생 폭증 ◆
#20대 후반 교사 A씨는 의대, 한의대, 약대 등을 목표로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교권 침해 사례가 많아지면서 교직에 대한 회의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수능에 킬러 문항이 배제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감도 더 커졌다. A씨는 "교직이 적성에 잘 안 맞아 수능을 다시 준비하기로 했다"며 "휴직 등을 통해 기간을 2년으로 잡고 학원을 다니거나 인터넷 강의를 들을 예정"이라고 했다.
올해 수능 원서 접수에서 N수생이 급증한 주요 원인으로는 '의·약학 계열 진학'에 대한 열망이 꼽힌다. 최근 입시에서 정시 선발 비중이 40%까지 확대되자, 이를 노리고 준비하는 수험생이 많아졌다는 분석이다. 서울 사립 명문대에 진학했다가 올해 수능에 다시 도전한다는 20대 초반 B씨는 "수능에서 고난도 킬러 문항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오랜 시간 공부한 N수생이 유리할 것으로 보고 도전에 나섰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입시에서 의대는 블랙홀처럼 인재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의대를 준비하는 학원이 생기고, 명문대 학생들 사이에서도 의대에 다시 도전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의사라는 직업 특성상 일반 직장인보다 연봉이 높고, 안정적인 전문직에 대한 선호가 높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인센티브 체계가 의사직에 유리하게 설계돼 있는 데다 사법시험이 사라진 지금, 의대 진학은 소위 우수 인재들이 공부만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사회적 사다리'로 여겨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와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의 선택을 막을 길은 없기 때문에 결국엔 국가적 인센티브 체계 왜곡이 수정되지 않는 한 의대 광풍은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중학교 1학년 아들을 키우는 40대 학부모 C씨는 벌써 의대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수학전문학원에 보내고 의대생 과외 등을 시켰지만 불안감이 있다"며 "유명 학원에서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선 심화학습을 많이 하라고 조언을 받아 학원을 바꿀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과 양천구 목동 등 유명 학원가에는 이미 '초등의대반'이 운영되고 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과정부터 '초등의대반' '중등의대반' 등을 별도로 신설해 의대나 명문대 진학을 위해 중학교나 고등학교 수학 과정을 선행학습하는 것이다.
메가스터디, 이투스, 종로학원 등 유명 입시학원은 재수생을 위한 의대반도 따로 운영하고 있다. 입시업계 관계자는 "의과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많아져야 '학원 실적'으로 홍보할 수 있기 때문에 신경을 써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대 광풍으로 "해외 의대라도 가자"는 입시생도 많아지는 추세다. 학원가에는 '헝가리 의대' 등 해외 의대 진학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외국 의대 졸업자의 경우 보건복지부 장관이 인정한 대학에만 국내 의사 국가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 별개의 예비시험을 통과하면 국내 의대생과 함께 응시하는 본고사를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의대 광풍은 의사들이 받는 처우가 일반 직장인보다 월등히 나은 데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소득이다. 올해 7월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통계 2023'에 따르면 국내 병·의원에서 월급을 받는 봉직의의 경우 연간 임금소득이 19만2749달러였다. 우리 돈으로 2억5600만원 수준이다. 이는 관련 통계를 제출한 28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다. 특정 병원에 속하지 않고 개인 의원을 차릴 경우 소득 수준은 더 올라간다. OECD 자료에 따르면 국내 개원의 연평균 임금소득은 29만8800달러, 우리 돈으로 약 3억9700만원이다. 이는 벨기에에 이은 2위로, 우리나라 의사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 매우 높음을 보여준다.
병원에서 교수와 전공의의 간극을 메우고 있는 입원전담전문의도 봉직의 못지않은 대우를 받고 있다. 입원전담전문의란 전공에 상관없이 병동에서 입원 환자를 돌보는 일만 도맡는 전문의다. 현재 우리나라 입원전담전문의의 평균 연봉은 2억원 수준이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인력이 가야 하는데 (의대 등) 한쪽으로만 쏠릴 경우에는 사회문제가 커질 수 있다"며 "의대 쏠림을 막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이공계에 더 나은 근무 여건을 만든다고 노력하고 있지만,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박정일 경기도교육연구원장은 "아인슈타인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의대에 진학했을 것"이라며 "과학기술을 지배한 국가가 세계를 제패한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송(공대라서 죄송합니다)'이 되면 희망이 없다"고 꼬집었다.
[강영운 기자 / 한상헌 기자 / 심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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