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동생·이웃들 기일은 같은 날…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새 증언
59년 전 오늘. 1964년 9월11일 의무부대 140명을 시작으로, 9년간 청룡·맹호·백마부대 등 34만6393명의 군인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됐다. 이후 1999년 한겨레21 보도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올해 2월 한국 법원은 한국이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정부는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60년의 세월이 쌓이며 베트남 한국군 참전지역엔 60개의 위령비와 증오비가 세워졌다. 한겨레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 현장을 찾아 다시 60년 전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빈타인(빈탄) 학살과 리선섬 이야기를 한겨레가 최초로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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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 틴틴.
산에서는 신비한 소리가 난다고 했다. 폴짝 뛰어올라 떨어지거나 무거운 돌을 던지면 틴틴 하면서 크게 울렸다는 것이다. 틴틴(Thinh Thinh)은 의성어다. 한국어로 치면 ‘쿵쿵’이다. 그래서 쿵쿵산, 아니 틴틴산이라고 했다.
틴틴산에 올랐다. 승용차를 타고 꼬불꼬불 이어지는 시멘트길을 20여분 넘게 갔다. 해발 168m의 틴틴산 정상에 도착하니 꽝응아이성의 빈탄 마을 전체가 한 눈에 잡혔다. 틴틴산 정상에는 틴틴사가 있었다. 1920년에 창건하여 100년도 넘은 절이다. 법회가 있는 날이라 신도들로 북적거렸다.
빈탄 마을은 한국인들이 관광지로 자주 찾는 베트남 다낭으로부터 남쪽으로 불과 100㎞ 떨어진 곳에 있지만, 한국 사람들은 거의 보기 어렵다. 틴틴사의 틱동록(49) 주지스님이 차를 내오며 한겨레 취재팀을 반갑게 맞았다. 스님은 한국 사람들에게 뭔가 할 말이 많아보였다.
“절 앞에서 큰 우물 보셨지요? 한국군도 거기서 물을 길어다 씻고 마셨다고 해요.” 틴틴산 정상 입구에 놓인 우물은 폭이 2m가 넘었다. 철망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닥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작고 허름했는데 한국군 병사들이 시멘트를 발라 개보수해줬다고 해요. 그 분들이 살아계시다면 분명히 그 우물을 기억할 겁니다.” 1994년 열반한 틱후옌닷 스님은 생전에 한국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단다.
빈탄은 1964년으로부터 출발하는 베트남전쟁 파병사에서 처음 이름을 드러내는 지역이다. 국방부가 1979년 펴낸 파월한국군전사에 빈탄은 없다. 빈탄 북쪽의 빈호아는 430여명에 이르는 대량학살과 이로 인한 한국군 증오비로 유명하다. 이런 자료에도 빈탄은 없다. 이제 증언이 시작된다.
“한국군 병사들 중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대요. 가끔 와서 예불도 하고 쌀 봉양도 했다지요.” 한국군은 이 절에 애틋한 기억을 남긴 듯 했다. “옛날엔 틴틴산 정상까지 올라오는 산길이 하나뿐이었답니다. 너무 좁아 한 사람만 다닐 수 있었대요. 한국군은 이 길로 올라오지 않았어요.” 한국군이 맞다면 청룡부대(해병제2여단)다. 그들은 헬기를 이용해 틴틴산 기지에 드나들었다. 철수할 때는 기지 시설물을 모두 불태우고, 쓰던 물건이나 문서를 땅에 묻었다고 했다. 그리고….
“철수 직전 한 군인이 틱후옌닷 스님을 찾아와 작은 금덩이를 주었다고 합니다. 전쟁 뒤 절을 잘 개보수하라면서요.”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감동이었을 것이다. 한국군을 기억하는 사람은 틱동록 스님만이 아니었다. 여러 빈탄 주민들이 있었다. 뜻밖에도 그들 중 일부는 ‘한국군 증오비’를 준비한다고 했다.
“우리는 고추를 땄어요.”
지난 8월5일 베트남 꽝응아이성(도) 빈선현(군) 빈타인사(읍·면)에서 만난 똥티킴로안(67)이 말했다. 57년 전 10살 소녀 로안은 할아버지 똥마이와 함께 밭에서 고추를 땄다고 했다. 고추밭의 햇볕은 살갗을 찌를 듯했다. 베트남 고추는 작고 매웠다. 한국군 병사들이 베트남 고추를 무척 좋아한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소녀는 고추를 작은 포대에 담아 고꼿 기지의 한국군을 찾아갔다고 했다.
처음 빈타인(빈탄)사에 주둔한 건 미군이었다. 그러던 1966년 8~9월의 어느 날 미군이 자취를 감추고 미군보다 키가 작고 동양인의 외모를 한 군인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한국군이었다. 1965년 10월 베트남에 상륙한 한국군 청룡부대는 푸옌성 뚜이호아를 거쳐 북쪽에 있는 꽝응아이성으로 왔다. 주민들은 낯선 군인들의 등장에 불안해졌다.
빈타인은 1964년으로부터 출발하는 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사에서 이번에 처음 이름을 드러내는 지역이다. 국방부가 1979년 펴낸 파월한국군전사에 빈타인은 없다. 빈타인 북쪽의 빈호아는 430여명에 이르는 대량학살과 이로 인한 한국군 증오비로 유명하지만, 이 자료에도 빈타인은 나오지 않는다. 지난 8월 빈타인에서 만난 주민들은 처음으로 한국군의 학살과 관련된 증언을 한겨레에 들려줬다.
똥티킴로안의 할아버지 똥마이가 한국군 초소를 찾았을 때, 할아버지 손에는 베트남 고추와 편지가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같은 마을에 사는 까오포, 마이깟과 동행했다. 세 사람은 마을을 대표해 한국군을 처음으로 대면했다. 모두 1890년대생으로 70살이 넘은 노인이었다. 이들이 한국군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문으로 작성됐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이들은 한국 사람도 당연히 한문을 읽을 줄 알 거라 생각했다. 빈타인의 한국군 부대에는 별도의 통역원이 없었다. 편지에는 노인들의 간곡한 마음이 담겼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양민들입니다. 절대로 해를 가하지 말아주십시오.” 편지와 선물이 건네진 자리에 어린 똥티킴로안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연막탄을 터뜨린 뒤 기관단총을 난사했어요.”
로안과 할아버지가 고추를 바치고 한달 뒤, 이번에는 한국군 병사들이 똥티킴로안의 동네를 방문했다. 그들은 총을 가져왔고, 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한국군은 아침을 먹기 전인 6~7시께 로안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가족들을 모두 바깥으로 나오게 했다. 어머니 마이티엔(30), 남동생 똥프엉(7), 똥흐엉(6)과 함께 나갔다. 같은 동네에 사는 본케 아저씨네 식구 6명이 끌려왔다. 그렇게 10명이었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먹을 것을 나눠줬다. 통조림이었다. 아마 ‘시레이션’(군 보급 전투식량)이었을 것이다. 큰 나무 밑에 기관단총을 세워놓는 광경을 보았다. 조금 뒤 갑자기 ‘팡’ 하고 뭔가 터지면서 연기가 났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연막탄이었다. 천지를 진동하는 총소리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로안은 엄마를 잡고 뒤로 숨었다.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쓰러졌고 로안은 맨 밑에 깔렸다. 총성이 멈추었다. 사람들의 신음 소리도 멈추었다.
엄마와 남동생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본케 아저씨네 식구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똥티킴로안 말고는 모두 피 흘린 채 숨을 거둔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군인들도 자신들의 총에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무서워 연막탄을 터뜨린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군인들은 주검을 확인하지 않고 돌아갔다. 천운이었다. 배에 작은 화상만을 입었다. 지금도 종종 총알이 배를 스치던 그 서늘한 느낌을 떠올린다.
엄마와 동생들의 제삿날은 음력으로 1966년 9월12일이다. 양력으로는 10월25일. 국방부의 파월한국군전사를 보면, 청룡부대는 1966년 8월18일부터 뚜이호아를 떠나 쭐라이와 꽝응아이성으로 왔다. 대부대가 이동하는 터라 9월15일까지 한달이 걸렸다. 파월전사엔 해당 기간의 자세한 기록이 없다. 11월8일까지도 없다. “부대정비와 병행해 9월24일부터 현지 주민들의 추수보호를 위한 황금작전을 했고 이게 끝난 다음부터 미군과 남베트남의 협조를 받아 비봉작전을 감행해 지역 내의 적을 격파함으로써 전술책임지역을 안정케 하고 중대전술기지 일부를 재배치했다”고만 적혀 있다. 지역 내 적을 어떻게 격파했는지는 알 수 없다.
도피했던 아버지가 밤에 돌아와 마을 아저씨들과 주검을 수습했다. 어머니의 무덤엔 바나나나무 한그루가 심어졌다. 어머니는 만삭이었다. 임신을 하면 축하의 의미로 바나나나무를 심는 마을 전통이 있었다. 출산 때가 되면 나무에 열린 바나나를 먹으며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했다. 어머니는 바나나를 먹으며 축하받을 일이 없었다.
“고추를 들고 간 노인들은 다 죽었어요.”
레반히엔(76)이 말했다. 레반히엔은 컴퓨터로 작성한 명단을 보여주며 맨 위의 1, 2, 3번을 가리켰다. 그 자리에는 순서대로 똥마이, 까오포, 마이깟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한국군 초소에 고추 포대와 한문 편지를 들고 간 바로 그 노인들이다. 1번 똥마이는 똥티킴로안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레반히엔은 “한국군이 고추만 받고 나중에 노인들을 다 죽였다. 군인들이 마을 수색 과정에서 똥마이를 먼저 죽이고 나중에 까오포와 마이깟을 동시에 죽였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준 문서는 1966~1967년 한국군에 학살당한 빈타인 주민 명단이었다.
1966년 당시 스무살의 무장유격대원이었던 레반히엔은 산에서 생활했다. 마을에 있던 그의 아버지 레소안은 1966년 9월26일, 둘째 형 레따오는 그해 10월17일 한국군에 살해당했다고 했다.
빈타인사의 한국군 기지와 초소는 빈히엡사 종짜인, 고꼿 짜인호이, 동프억촌 동호아, 틴틴산 정상 이렇게 네곳이었다는 게 레반히엔을 비롯한 주민들의 증언이다. 빈타인사 한가운데 있는 틴틴산 정상에 중대 규모 부대가 있었다면, 똥티킴로안이 찾아간 고꼿에는 소수의 소대가 있었다고 했다. 한국군은 1967년 12월21일부터 이곳을 떠났다.
레반히엔은 빈타인 지역의 인민들이 어떻게 외부 세력에 맞서 싸웠는지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1930년부터 1975년까지의 역사는 이미 책으로 출간했다. 그 안에 한국군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최근에야 주민들의 증언을 수집해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면서, 또 한장의 문서를 보여줬다. 50명이 적힌 워드 문서가 아니라 볼펜 글씨로 적힌 종이였다. 추가로 증언을 확보한 12명의 명단이었다. 현재까지 빈타인 지역에서 집계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희생자 총합은 62명이라는 이야기다. 레반히엔은 자료 조사가 완료되면, 희생자들을 위한 추념 시설을 지을 것을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1975년 4월 해방 뒤 한국군에 의해 인명피해를 입은 마을마다 위령비가 세워졌다. 빈호아나 푸옌 같은 곳에는 증오비가 세워졌다. 전쟁 직후뿐만 아니라 50년이 지나서 세워진 곳도 있다. 2019년 비를 세운 꽝남성 디엔반시의 꽝허우다. 한베평화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그렇게 세워진 위령비가 베트남에 60개다. 그런데 아직 빈타인에는 위령비가 없다.
레반히엔은 “위령비가 아니라 증오비를 세울 것을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희생된 사람들이 모두 힘없는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베트남 정부의 슬로건인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라는 말을 꺼내더니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도 증오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일은 영원히 증오해야 합니다.”
꽝응아이·빈타인/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곽진산 기자 kjs@hani.co.kr 통역 응우옌응옥뚜옌(다낭대 한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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