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파이어', 이기적인 소설가의 비겁한 사랑법 [TEN리뷰]
여름날 청춘들의 열기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그리는 세계는?
[텐아시아=이하늘 기자]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씨가 사그라진 뒤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뭇거뭇한 재만이 남는다. 인류의 문명을 번성하게 만들어준 존재이면서 동시에 재앙이 되기도 하는 불은 양면적인 특성을 지녔다. 강렬하면서도 자기 파괴적인 불은 어쩐지 인간의 깊숙한 내면을 닮아있는 것만 같다.
13일 개봉하는 영화 '어파이어'(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자신을 불구덩이 안으로 집어넣는 한 남자를 조명한다. 오프닝에서 레온(토마스 슈베르트)는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와 함께 시골 별장에 향하는 길이다. 창문 너머로 펼쳐진 초록빛의 나무는 순식간에 형체를 일그러뜨리고 레온의 눈앞에서 사라진다. 레온이 응시하던 풍경은 자동차가 고장 나면서 정지된다. "망가졌어"라는 펠릭스의 말은 풍경 위에 겹치며 마치 자동차가 아닌 레온이 보는 모든 시야가 망가졌다는 이중적인 의미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동 수단을 잃고 걸어가기로 결심한 두 사람은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간다. 스치듯 보던 아름다운 풍광과는 사뭇 다른 오싹한 기분에 레온은 공포를 느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려오는 하늘은 레온의 두려움을 배가시킨다.
소설가인 레온은 영화 시작부터 길을 잃은 것만 같다. 조용하게 원고를 마감하기 위한 공간으로 선택된 시골 별장으로 가는 길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는 레온의 경로가 이탈했음을 알리는 시도다. 도착한 별장에는 늘어진 옷가지와 먹다 남은 음식들이 널브러져 있고, 펠릭스와 달리 레온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다. 별장을 어지른 존재, 나디아(폴라 비어)는 레온, 펠릭스와 함께 긴 여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어파이어'는 공동체의 바깥에서 배회하는 레온을 통해 소통이 어긋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킨다. 소설 마감을 하러 온 레온은 뜻대로 써지지 않는 글 때문에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인다. 레온의 눈에 수영하자는 펠릭스의 제안은 한심하고 의미 없는 놀이처럼 비칠 뿐이다. 레온과 나디아의 대화 역시 과녁을 빗나가는 화살을 닮아있다. 두 사람의 만남으로 돌아가보자. 레온은 집 안에서 창문을 통해 마당에 있는 나디아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이때, 나디아는 레온을 보지 못한다. 반대로 나디아는 마당에서 자고 있는 레온을 집 안에서 창문을 사이에 두고 보게 된다. 창문이라는 틀을 사이에 두고 레온과 나디아는 시선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시선은 서로를 향한 마주보기가 아닌, 일방적인 응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창문에 대한 묘사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영화 '운디네'(2020)에서 운디네(파울라 베어)는 전 남자친구 요하네스(제이콥 맛쉔즈)가 카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지 지켜보기 위해 자꾸만 창문 밖을 내다보지만 두 사람은 분리된다. 그런가 하면, '바바라'(2013)에서 안드레(로날드 제르필드)는 출근하는 바바라(니나 호스)를 바라보지만, 바바라는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 '어파이어' 역시 마찬가지다. 페촐트 감독은 경계선과도 같은 창문을 통해 타인과 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
레온과 나디아의 대화가 불통인 까닭은 두 사람이 결합하거나 융화되지 못하기 때문인데, 싱그러운 자연과 푸르른 바다를 뒤에 두고도 레온은 자신의 내면 안으로 한없이 파고든다. 나디아에게 분명 호감을 느꼈음에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나디아의 남자친구에게 툭툭 말을 내뱉거나 제안을 모두 거절하는 고집불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펠릭스와 나디아, 나디아의 남자친구가 밤중에 배드민턴을 치는 장면에서도 그렇다. 어둠 속에서 홀로 있던 레온은 창문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을 본다. 이 불빛은 친구들의 놀이에서 비롯된 것. 창문을 열고 친구들과 소통을 선택하기보다는 커튼 뒤로 몸을 숨기는 레온은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공간에 갇히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이다.
완벽한 소설을 쓰지 못해 불안감을 느끼는 레온과 경계선을 넘을 듯 넘지 않는 산불은 그 속성이 닮아있다. 시골 별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레온은 산불의 존재를 인식하지만, 자신의 공간에 침범하지 않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소설 쓰기 외에는 수리해야 하는 지붕도, 설거지도, 수영도 일이 아닌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산불 역시 그들이 있는 공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째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거리를 좁혀간다. 굉음을 내는 헬기도, 하늘에서 날리는 재도 산불은 크기를 키우며 공간을 위협한다. 자신의 내면을 갉아먹는 레온, 이상하게도 소설을 쓰는 모습은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쓰는 모습 대신 고민하는 과민한 태도만 비칠 뿐이다. 산불 역시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화 속에서 산불은 한 걸음씩 거리를 좁히고 있다.
나디아에게 자신의 소설을 보여준 레온은 "소설이 쓰레기 같다"는 혹평을 듣게 되고, 분노를 참지 못한다. 소설가 사장마저 소설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고역 그 자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머리를 식히러 간 바다에서 거센 바람은 레온의 소설을 이리저리 펼쳐놓으며 레온을 비웃는 것만 같다. 감정보다는 묘사 위주로 서술된 레온의 소설 '클럽 샌드위치'는 무미건조하면서 모든 것이 타버린 재를 닮아있다. 거센 열기의 불꽃이 아닌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태처럼 보이고, 타인의 감정과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는 레온의 이기심은 소설에 그대로 반영되어있다.
이후 영화는 모든 것을 앗아간 산불의 참혹한 현장을 보여준다. 사실 '어파이어'는 자기 파괴적인 예술가의 이야기이자 환경 영화로도 읽을 수 있다. 경각심을 갖지 않던 레온처럼, 분명 전조증상은 있었지만 애써 무시한 상황에 대한 통탄이다. 또한 나디아에 대한 호감을 가졌음에도 마음을 부정한 채, 꾹꾹 눌러 담은 사랑에 관한 영화로도 볼 수 있다. '어파이어'는 타오르는 불씨가 꺼져버린 순간에 주목한다. 다가오지 않을 것만 같던 불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이후에 잿더미가 된 숲과 죽음을 맞이한 동물들. 타오르는 순간은 타들어 간 순간마저 동원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불은 강렬하지만 무섭고 그렇기에 아찔하다.
페촐트 감독은 '어파이어'를 통해 여름날의 뜨거운 날씨처럼 날 것 그대로의 청춘들을 그려낸다. 우리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감독의 물음에 자꾸만 레온의 머뭇거리던 얼굴이 기억나는 순간이다.
영화 '어파이어' 9월 13일 개봉. 러닝타임 102분. 12세 관람가.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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