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욱의 한국술 탐방 | 국내 수제맥주 최초 맥주 올림픽 은메달 수상 맥주 양조장 ‘비어바나’ 이인기 대표] 국산 흑맥주 ‘영등포터’ 세계가 인정…보리와 홉의 쌉쌀한 조화

박순욱 조선비즈 선임기자 2023. 9. 1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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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기 비어바나 대표현 한국수제맥주협회장, 현 ‘비어포스트’ 발행인, 전 예당엔터테인먼트 콘텐츠 기획 담당 사진 박순욱 기자

서울 문래동의 핫한 브루펍 ‘비어바나’는 2018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철공소 3층짜리 건물을 리뉴얼해 1층은 맥주 양조장, 2~3층은 펍으로 운영하고 있다. 1층 양조장은 10여 개의 맥주 발효탱크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데, 이곳을 찾는 젊은 세대의 셀카 배경으로 각광받는 곳이다. 봄가을처럼 야외활동하기 좋은 계절에는 옥상 루프톱 역시 사진 찍기 좋아하는 MZ 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가 해 질 녘부터 줄을 선다. 2층 테이블에 앉으면, 철공소 시절 사용했음직한 장비들이 철거되지 않고 지금은 인테리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직도 낮에는 쇠 깎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저녁이 되면 골목마다 독특한 모양의 조명이 켜지면서 낮과는 전혀 다른 감성을 연출하는 문래동의 상징 같은 곳 중 하나가 이곳 비어바나다.

그런데, 국내 150여 곳의 소규모 맥주 양조장 중 한 곳인 비어바나가 최근 국내 수제맥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고(?)를 쳤다. 지난 5월, 국내 수제맥주 업체로는 처음으로 ‘맥주 올림픽 은메달’을 딴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맥주 대회인 ‘월드비어컵(WBC)’에서 비어바나가 출품한 흑맥주 ‘영등포터’가 은메달을 수상했다. 1996년부터 개최된 월드비어컵 역사를 통틀어 한국의 수제맥주가 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니, 그 의미를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월드비어컵은 미국양조협회가 주최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맥주 품평 대회로, ‘맥주 올림픽’ ‘맥주계의 오스카’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그런 만큼, 월드비어컵 수상은 세계 최고 수준의 맥주로 평가받았다는 의미다. 올해 월드비어컵에는 전 세계 53개국 2367개 양조장에서 1만213개의 맥주가 출품됐고, 이 중 총 306개의 맥주에만 메달의 영광이 주어졌다. 아시아 국가 맥주가 받은 메달 수는 영등포터를 포함해 고작 7개에 불과했다.

그럼 월드비어컵 은메달에 빛나는 영등포터는 어떤 맥주일까. 우선 이름부터 보자. 영국식 포터(porter) 스타일의 맥주로, 양조장이 자리한 ‘영등포’와 ‘포터’를 합쳐 이름을 지었다. 흔히 흑맥주로 통칭되지만, 기네스 같은 스타우트 계열의 흑맥주에 비해 포터는 도수가 약간 낮고 음용성이 좋아 여러 잔을 한자리에서 마실 수 있는 흑맥주다. 포터는 18세기 초 영국에서 개발된 흑맥주로, 짙은 색으로 가공된 맥아를 사용해 어두운 색깔의 외관, 곡물의 풍미를 특징으로 한다. 부둣가 짐꾼(porter)들이 즐겨 마셨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영등포터는 달큰한 보리와 쌉쌀한 홉이 밸런스를 이뤄, 단맛과 쓴맛 어느 쪽도 도드라지지 않아 맥주 전문가들로부터 완성도 높은 제품으로 평가받아 왔는데, 이번에 드디어 맥주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영등포터 맥주를 만드는 비어바나 이인기 대표를 문래동 영업장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월드비어컵 은메달 상패와 그 상을 받은 비어바나의 흑맥주 ‘영등포터’. 사진 비어바나

음악과 술(맥주)의 공통점은.
“우선, 음악과 맥주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인간에게 필요한 기호 대상인데, 음악은 귀로 듣고, 맥주는 코로 향기를 맡고 입으로 즐긴다. 그래서 맥주와 음악이 합쳐지면 훨씬 시너지가 커진다. 그래서 맥주 축제 때 음악 공연을 꼭 넣는다. 음악과 맥주는 감각의 영역에서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신의 가장 중요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음악도, 술도 세월 따라 달라지지 않나.
“음악을 즐기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지,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가령 이전에는 음악을 라디오, 음반, CD 등으로 들었다면 지금은 유튜브 같은 디지털 매개체를 통해 듣고 있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다. 맥주도 마찬가지다. 병, 캔, 케그(생맥주) 등 다양한 용기(형식)에 담아서 맥주를 마시지만, 형식만 다를 뿐, 본질(내용물)은 다르지 않다.”

음악 그리고 술 제조를 하는 사람의 공통점도 있나.
“이전에 음악 비즈니스를 할 때 느낀 건데, ‘음악을 다루는 사람은 신과 인간의 중간 영역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신이 내려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음악을 하고, 그 음악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맥주의 세계로 넘어왔더니 똑같은 느낌이었다. 맥주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 물론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시면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암튼 맥주는 사람들 마음을 평화롭게 해준다는 면에서 맥주를 만드는 사람 역시, 신에게서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지금 맥주를 만드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맥주 잡지 ‘비어포스트’를 만든 취지는.
“인사동에 해외 프리미엄 맥주 전문점 슈가맨을 열고서, 맥주 공부를 해보니, 우리나라에 맥주 관련 책이 하나밖에 없어서 미국 아마존에서 맥주 책들을 주문해 읽었다. 맥주 책을 보면 볼수록, 맥주가 맛있는 음료라는 걸 알게 됐고, 이를 널리 알리고 싶어 잡지를 창간했다. 잡지 내용 절반은 맥주에 관한 상식, 절반은 국내 맥주 업계 소식이다.”

양조장을 비어바나(Beervana)라고 붙인 이유는.
“Beer와 Nirvana(열반)를 합쳐 부르는 말인데, 맥주 천국이라는 의미다. 인사동에서 맥주펍 슈가맨을 하던 시절, 어떤 미국 손님이 Beervana를 아느냐고 물어서 모른다고 했더니, 미국에서는 오리건주 포틀랜드를 Beervana City라고 부르는데, 거긴 훌륭한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 많아서, 미국 맥덕(맥주 덕후, 맥주 마니아)들은 꼭 한번 Beervana에 가보고 싶어한다고 얘기해줬다. 그때 Beervana를 수첩에 넣어두고 나중에 맥주 사업을 할 때 쓸 수도 있겠다 싶어 한국 도메인을 사두었다가 이번에 브루펍을 문래동에 열면서 이름을 Beervana라고 했다.”

편의점의 ‘네 캔에 만원’ 저가 정책이 수제맥주 업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나.
“코로나19가 3년간 기승을 부리면서, 수제맥주 생태계가 완전 무너졌다. 코로나19 전에는 전국의 수제맥주를 생맥주로 마실 수 있는 맥주펍이 많이 생겼고, 캔이나 병으로 살 수 있는 보틀숍도 늘었지만, 코로나19 이후 이 같은 수제맥주 유통 채널이 많이 없어졌다. 그사이 편의점 매대에 ‘만원에 네 캔’ 수제맥주들이 등장하면서 편의점 수제맥주 품질이 급격히 떨어졌다. ‘만원에 네 캔’을 맞추려면 재료비를 아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수제맥주 양조장은 과일 풍미를 낼 때 실제 과즙을 넣는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요구하는 단가를 맞추기 위해 원재료 중 이것저것 빼기 시작했고, 합성 감미료를 넣기 시작했다. 인공 향미를 넣은 수제맥주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소비자들도 편의점의 수제맥주를 점점 외면하게 됐다. ‘수제맥주 맛이 왜 이래?’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수제맥주도 대기업 맥주랑 다를 게 없네’라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실정이다. 수제맥주 판매로 돈을 벌 수 있는 맥주펍, 보틀숍들이 많이 생겨나야 수제맥주 생태계가 살아나는데, 경기가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비어바나 이인기 대표는 편의점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컬래버 맥주 붐에 대해선 부정적이었지만, 지난 7월에는 직접 컬래버 맥주를 내놓았다. 한미 동맹 70주년 기념 맥주 ‘동맹 페일에일(Alliance Pale Ale)이 그것이다. 이 맥주는 주한미국대사관 농업무역관이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과 미국의 협력 관계를 상징하기 위해 한국의 몰트(맥아), 미국의 홉을 사용해 비어바나 양조장에서 만들었다. 주한미국대사관 주최로 열린 올해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행사 공식 맥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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