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건축 세계 <7> 타르] 권력 대신 음악을 중심에 둔 공간, 베를린 필하모닉 홀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2023. 9. 11. 18: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강현석SGHS 설계회사 소장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서울대 건축학과 출강,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고요한 적막을 깨고 장엄한 트럼펫의 팡파르가 시작한다. 이어서 섬세한 바이올린과 구슬픈 플루트의 화음이 합세하며 연주는 점점 크고 강렬하게 변화한다. 심장 박동 같은 팀파니와 심벌즈의 리듬은 공기 속을 퍼져 나가는 음악에 생명력을 더한다.

이같이 오케스트라가 교향곡을 연주하는 풍경은 종종 이상적인 사회 모델로 비유된다. 실제로 교향곡을 뜻하는 ‘심포니(symphony)’의 어원은 ‘동시에 울리는’ 또는 ‘협화하는 음’을 의미한다. 100명이 넘는 연주자가 각자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전체를 위해 조율하는 모습은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상과 닮아 있다.

오케스트라의 배치 또한 이상적인 소리를 만들기 위한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소리가 작고 움직임이 많은 현악기를 전면에 세우고, 부드러운 소리의 목관악기 그리고 강한 소리의 금관악기와 타악기를 순서대로 동심원을 따라 배치한다. 동심원의 중심에 지휘자가 서면서 각 연주자의 위치는 그로부터 거리에 따라 서로 다른 위계를 갖는다. 같은 악기군 내에서도 서열이 높은 연주자일수록 지휘자와 더 가깝게 자리한다. 따라서 오케스트라 구조는 완벽한 음의 조화를 위한 것이지만, 다른 시선에서는 날카로운 권력의 피라미드로 비칠 수 있다. 여기에는 지휘자가 음악을 위한 지휘봉 대신 개인적 욕망을 손에 쥐게 될 때, 그 영향력에 쉽게 장악될 수 있는 취약성이 내재해 있다.

토드 필드 감독의 영화 ‘타르(TAR)’. 사진 네이버영화

영화 ‘타르’와 권력의 몰락

토드 필드 감독의 2022년 작, ‘타르(TAR)’는 음악과 권력에 대한 영화다. 주인공 리디아 타르는 세계 3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의 최초 여성 수석 지휘자로 등장한다. 영화는 음악가로서 인생의 정점에 선 타르가 왜곡된 욕망으로 인해 순식간에 몰락해 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녀가 도구 삼은 권력은 음악 피라미드의 정점인 지휘자의 지위에서 비롯된다. 타르는 이를 통해 주변 인물들, 특히 젊은 예술가들을 포식한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인 타르는 젊은 여성 첼리스트 올가에게 매혹돼 그녀를 부적절한 방식으로 채용하고 솔리스트로 승격시킨다. 또 배우자 샤론이 모르게 자신의 뉴욕 출장에 은밀히 동행하도록 한다.

영화에서 타르의 몰락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젊은 여성 지휘자 크리스타의 자살 사건이다. 타르는 사이가 멀어진 옛 제자, 크리스타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주요 오케스트라에 그녀를 채용하지 않도록 종용하는 메일을 보낸다. 결국, 갈 곳이 없는 크리스타는 현실을 비관해 자살하고, 이를 계기로 타르의 권력형 착취에 대한 증언들이 쏟아져 나온다.

베를린 필하모니 홀. 사진 tipBerlin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음악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음악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교향곡 제5번으로, 타르와 베를린 필하모닉은 이 곡의 실황 녹음을 준비 중이다. 영화는 음악을 주제로 다뤘지만, 한 곡이 온전하게 연주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음악은 오직 짧은 리허설 장면들을 통해서만 잠깐씩 드러날 뿐이다.

이 같은 설정은 역설적으로 삶과 음악의 본질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음악 연주 중에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심리적 전개는 잠시 소강상태로 변한다. 복잡한 현실은 음악 속에서 용해되며, 관객은 연주자의 섬세한 움직임과 음악적 표현에 일시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초현실적인 악몽과 불안 증세에 시달리는 타르 역시 음악 앞에서는 대담한 지휘자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음악과 현실의 대비는 음악의 절대적인 존재성과 포용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구스타프 말러의 말처럼 교향곡은 세계 그 자체이며, 모든 것을 포용한다.

베를린 필하모닉 홀. 사진 Divisare

음악을 중심으로 한 건축

실제 영화에 등장하는 콘서트홀은 베를린이 아닌 드레스덴 필하모닉 홀에서 촬영됐다. 그러나 1963년 완공된 베를린 필하모닉 홀의 ‘중심에 대한 개념’은 타르의 욕망과 대조될 때 흥미로운 측면을 보여준다. 건축가 한스 샤룬(Hans Scharoun)은 베를린 필하모닉 홀을 설계할 때 ‘음악을 중심에 두는 것’을 원칙으로 고수했다. 당시 일반적인 콘서트홀은 장방형 공간의 한쪽 끝에 무대를 두고 이와 마주하도록 객석을 배열하는 ‘구두 상자형’이었다. 이에 따라 무대에서 객석으로 일방적인 계층구조가 형성됐다.

샤룬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중앙에 육각형 무대를 두고, 객석을 방사형으로 에워싸는 혁신적인 설계를 도입했다. 모든 관객이 무대를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객석 테라스를 블록으로 나누고, 높이를 다르게 적용했다. 각도와 형태가 다른 객석 블록이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계곡과 포도밭의 아름다운 풍경을 연상시킨다. 천장 면은 경사진 포도밭을 따라 연속된 곡선으로 설계되어 강당 내부의 음향 확산을 극대화했고, 이로써 음악은 중앙의 바닥에서 올라와 관객에게 내려앉는 방식으로 전달된다. 천장의 유기적인 형태는 지붕으로 이어져 거대한 텐트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음악을 중심으로 한 내부 개념은 건물의 외부까지 투영되어 나타난다.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건축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연주자, 지휘자, 관객이 하나의 텐트 안에서 음악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모든 객석 간의 시선이 완벽하게 열려 있는 음악 공동체의 공간은 구성원 간의 친밀감과 조화를 나타낸다. 이러한 샤룬의 ‘포도밭형’ 디자인은 당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부터 현재까지 많은 음악당이 모델로 삼고 있다.

움직임의 음악

영화 속 장면처럼 음악은 우리의 삶과 현실을 포용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콘서트홀의 로비 공간은 종교 건축의 전이 공간처럼(매개 공간) 현실과 음악 공간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다. 출입구를 통과해 마주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홀의 1층 로비 공간은 모든 벽과 기둥, 천장이 제각각 다른 각도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다. 2층부터 시작하는 포도밭 객석 블록의 경사 바닥은 그대로 로비 위로 드러나 ‘V 자’ 기둥들로 지지가 된다. 어지럽게 놓인 복잡한 형태의 계단들은 방사형의 객석 배치에 기인한다. 관객은 티켓을 수령한 후 객석에 도착하기 위해 계단, 발코니, 갤러리, 다리를 오르내리다가 비로소 콘서트홀에 도착한다. 이때 관객의 눈앞에 거대한 규모의 포도밭 계곡이 펼쳐지고, 쌓였던 긴장이 해소된다. 건축가는 모든 것이 음악 경험을 위해 준비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영화의 한 대목은 베를린 필하모닉 홀의 로비 공간에 대한 이해를 간접적으로 돕는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한 타르는 어릴 때 보았던 미국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의 비디오를 틀게 된다. 여기서 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음악이 움직임이란 걸 잊지 마세요. 항상 어디론가 움직이며 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흐른다는 것을요. 그 움직임은 백만 단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타임톡beta

해당 기사의 타임톡 서비스는
언론사 정책에 따라 제공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