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71>] 거부를 욕망하고 거부를 요구하다
주인공이란 무엇일까. 한 편의 이야기 속에서 변화하는 사람이다. 시작할 때 이만저만한 결핍을 안고 있던 인물이 끝날 때는 어떤 식으로든 그때 그 결핍을 극복하고 성장해 버린 사람. 성장의 의미는 정의하기 나름일 것이나 성장의 핵심에도 변화는 있다. 주인공이 아닌 사람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순진하게 나는 여전히 이 ‘법칙’이 유효하다고 믿는다.
‘필경사 바틀비’가 출간됐을 때 독자들의 반응은 분분했던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필경사 바틀비’가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건조하지만 우수 깊은 문체, 낯선 인물과 사건, 월스트리트에 있는 법률사무소라는 창백한 배경, 자본주의와 계급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 주제의 보편성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주인공 바틀비가 한 치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초지일관 자기 좋을 대로만 한다.
‘창백할 정도로 말끔하고 가련할 정도로 점잖고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쓸쓸한’ 바틀비가 작품 속에서 내뱉는 대사라고는 한결같이 이런 것이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에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바틀비로 인해 법률사무소에는 이전에 없던 세계 하나가 생긴다. ‘싶은’이라는 세계다. 일찍이 그곳에는 ‘싶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존에 존재하는 글을 똑같이 베끼는 필경사의 일처럼 이미 있는 것만이 그 있음을 계속했다. 더욱이 그를 고용한 변호사인 화자는 무탈한 하루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안전 지향 주의의 전형이다. 그런 사무실에 나타나 ‘싶지 않고’ 싶음을 피력하는 사람, 즉 거부를 욕망하고 거부를 요구하는 사건이 등장한 것이다.
변화는 오히려 변호사에게서 나타난다. 변화 없는 일상을 최고 가치로 알고 살아온 사람에게 말이다. 그는 자신이 고용한 바틀비가 자신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해고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분노하지만 이내 저항받고 싶은 기이한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급기야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 극단적 외톨이인 바틀비에게 점점 더 연민을 느낀다. 끝내 바틀비를 해고하는 데 실패한 변호사는 그를 떠나보낼 수 없으므로 자신이 떠나기에 이른다. 사무실을 이전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 사무소를 쓰는 사람들에게 신고당한 바틀비가 교도소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를 찾아간 변호사는 식음을 전폐한 바틀비에게 뭐라도 먹여 보려 애쓰지만 모두 허사다. 바틀비는 교도소에서 차갑게 죽는다. 변호사는 왜 바틀비를 향해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사용하지 못했을까. 그를 해고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가 두 손 가득 있었는데도. 그는 바틀비의 죽음 이후 그에 대한 소문 하나를 듣는다. 자신의 사무소로 오기 전 바틀비가 배달 불능 편지를 처리하는(불에 태워 없애는) 일을 하다 행정부가 바뀌며 해고됐다는 얘기다. 바틀비가 처리한 편지들은 출발했지만 도착하지 못한 마음들이었다.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이들에게 보내진 편지를 읽는 바틀비는 죽음의 자리에서 그 편지를 읽었을 것이다.
어디에도 도착할 수 없는 편지들
어디에도 도착할 수 없는 편지들처럼 바틀비는 누구의 의견도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누구에게도 도착할 수 없는 존재였다. 변호사를 비롯해 바틀비를 둘러싸고 있는 그 누구도, 자신을 바틀비에게 보낼 수 없었다. 배송 불능 편지의 수신자였으며 끝내 변하지 않았던 바틀비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건 처음부터 죽음이었던 바틀비가 끝내 죽음인 것과 다르지 않은 결말이다. 변하지 않는데도 문학사가 기억할 만한 주인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건 그가 죽음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죽음을 거부하지 못하는 생명처럼 바틀비를 거부하지 못했다.
변호사의 자리에 생명을, 바틀비의 자리에 죽음을 넣어 보자. 죽음은 생명이 원하는 어떤 요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죽음은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오직 자신이 원하는 때에만 수행한다. 생명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맞지만 생명은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도 죽음에서 구할 수 없고, 그럼에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죽음의 자리에 신을, 생명의 자리에 인간을 넣어 볼 수도 있겠다. 신은 인간이 원하는 어떤 요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신은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오직 자신이 원하는 때에만 수행한다. 인간이 자신의 신을 선택한 것은 맞지만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도 신에게서 구할 수 없고, 그럼에도 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창백할 정도로 말끔하고 가련할 정도로 점잖고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쓸쓸한’ 죽음이다. 그러나 나는 이 변하지 않는 주인공, 죽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을 서글픈 이야기로 읽지 않는다. 죽음은 어떤 경우에도 변할 수 없기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삶이 변한다. 변호사가 변한 것처럼. 어쩌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필경사 바틀비가 아닐지도 모른다. 안전 제일 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안전하지 않은 존재를 버릴 수 없었던 변호사야말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지나친 오독일까. 아, 인간이여! 아, 생명이여!
Plus Point
허먼 멜빌
19세기 미국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가세가 기울고 아버지가 사망한 뒤 학교를 중단한 채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스무 살에 처음으로 배를 탄 뒤 포경선을 타고 고래를 잡는 모험을 체험하거나 군함의 수병이 되는 등 선원 생활의 경험을 쌓았다. 이런 경험이 ‘모비딕’을 비롯한 해양 소설에 영감을 줬다. 대표작으로 ‘오무’ ‘레드번’ ‘하얀 재킷’ 등이 있으며 ‘필경사 바틀비’처럼 수작으로 손꼽히는 단편도 다수 썼다. 19세기 미국 산업사회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조를 통해 자본주의의 비극성을 간파했다는 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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