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퓨전] 韓 주도 세계 최대 핵융합실험로 현장 가보니…"퍼스트무버 시행착오 감내"
"이 문 너머부터는 실제 장치에 필요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직경 30m정도 되는 큰 깡통이 이 문을 통해 드나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난 7월 방문한 프랑스 남부 카다라슈 소재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조립동은 세계 최대 규모의 핵융합실험로가 만들어지는 공간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립이 이뤄지는 공간은 높이 60m, 무게 500t의 거대한 문으로 분리돼 있다. 조립하는 공간의 청결도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 작업 공간을 완벽하게 차단한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내부엔 초고온 플라즈마를 가두기 위한 진공용기가 구축된다. 중성자와 열의 유출을 막기 위한 진공용기는 각각 4개의 세그먼트로 구성된 섹터와, 섹터를 감싸는 초전도자석인 TF코일 그리고 열차폐체가 조립된다. 초전도자석은 영하 268도 환경에서 막대한 전기 에너지를 전달한다. 열차폐체는 초고온 플라즈마와 진공용기 밖을 두르고 있는 초저온 상태의 초전도자석을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총 9개로 나눠진 거대한 섹터를 모두 조립하면 도넛 모양의 토카막 장치가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조립동을 총괄하는 양형렬 ITER 조립팀장은 "현재 3개의 섹터에 대한 조립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며 "1mm 오차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작업으로 엔지니어링 관점에서 매우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라고 말했다.
● 초대형·초정밀 프로젝트, 주요 장비 제작 주도하는 한국
유럽연합(EU), 일본, 러시아, 중국, 인도 등 7개국이 참여하는 현존 최대의 ITER에서 한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총 9개의 섹터 중 4개의 제작을 담당한다. 정밀한 기술력이 요구되는 조립장치도 한국의 기업이 제작했다. 진공용기 장치를 가운데에 매단 채 양쪽에서 초전도자석을 끼우는 이 장치는 아주 작은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정교한 기술력이 필수적이다.
양 팀장은 "무게 중심을 잘 맞춰 미동도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프랑스의 까다로운 안전기준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에 아주 꼼꼼한 공정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립장에 있는 수많은 장치에는 각기 다른 색의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양 팀장은 "조립동에서 각국이 조달하는 장비는 각기 다른 색깔이 표시돼 있는데 미국은 노란색, 한국은 회색이다"라고 말했다. 조립동에서 분주하게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많은 장비는 회색 스티커가 붙어 있다. 차세대 에너지원이라 불리는 핵융합에너지 개발의 첨단에서 한국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었다.
석탄에너지와 달리 에너지를 얻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핵융합에너지는 '꿈의 에너지'라 불린다. 막대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면서도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에 청정 에너지라 불린다.
핵융합은 중수소와 삼중수소 같은 가벼운 원소의 원소핵들이 결합해 무거운 원자핵으로 변하면서 에너지를 내놓는 현상이다. 태양이 열을 내는 원리와 유사해 '인공태양'이라 불린다. 우라늄과 플루토늄 등 무거운 원소를 쪼개 에너지를 내는 핵분열을 통한 원자력 발전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려면 1억도 이상 초고온 상태의 플라즈마(원자핵과 전자가 분리된 이온 상태)가 필요하다. 태양은 자체 질량과 중력으로 초고온 플라즈마 상태를 스스로 만들지만 지구에서는 1억도의 초고온 플라즈마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핵융합에너지는 이론적으로 약 1kg의 핵융합 연료로 1000만kg의 화석 연료와 맞먹는 에너지 생산이 가능하다. 삼중수소와 함께 에너지의 '연료'가 되는 중수소를 바닷물에서 무한히 얻을 수 있는 점에서 경제성 또한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ITER 제작과 조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은 핵융합에너지 분야에서 어느덧 선두국으로 자리잡고 있다.
● 한국기업 납품한 부품 결함 발생…"첫 납품국 불가피한 시행착오, 주요 일정은 이상 無"
핵융합에너지 생산을 위한 길은 험난하다. 지금까지의 과학기술로 구현하지 못했던 장치를 구현하고 실험에 성공해야 한다. 주요 과학 선진국들이 대거 참여하는 ITER 프로젝트 또한 2006년 공식 출범한 이후 수 차례 일정을 수정했다.
최근에는 플라즈마 생성 실험의 연기가 잠정 결정됐다. 지난해 11월 도넛모양의 장치인 토카막을 구성하는 부품의 결함이 발견되고 인선에 변화가 일어나는 등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겹쳤기 때문이다. 부품결함의 경우 ITER 차원에서 이뤄진 조사 결과 진공용기 안에 존재하는 초고온 플라즈마와 진공용기 밖을 두르고 있는 초저온 상태의 초전도자석을 분리하기 위한 열차폐막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열차폐막의 일부가 부식에 취약해 헬륨이 누설된 것이다. 진공용기 부품의 치수도 원래 설계했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문제가 발생한 열차폐막은 한국 기업이 납품해 국내 핵융합에너지계가 긴장하기도 했다.
ITER에서 만난 노창현 열차폐막 제조 엔지니어는 "ITER 내부에서 이뤄진 철저한 조사 결과 해당 부품들은 ITER 국제기구가 수행한 설계 단계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기업들은 ITER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장비를 납품하고 있는 만큼 예상치 못한 시행착오에 직면하기도 한다"며 "참여국들 중에서도 '퍼스트 무버' 역할을 하면서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학계 일각에선 플라즈마 생성 실험이 연기되면서 ITER 프로젝트가 또한번 거대한 암초에 부딪힌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관련해 캐서린 맥카시 미국 ITER 프로젝트 책임자는 최근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린 ‘핵융합공학심포지엄 2023(SOFE 2023)’에서 "부품결함이 연구팀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라며 “당초 2026년 예정됐던 플라즈마 생성실험은 다소 지연되겠지만 중수소와 삼중수소(DT)를 결합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핵심 실험은 2035년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의 무더운 여름 속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ITER 관계자들은 매끄럽지만은 않은 ITER의 행보에 대해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사비나 그리피스 ITER 홍보담당관은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ITER 프로젝트의 방식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하면서도 "차세대 에너지원인 핵융합에너지 기술 역량을 각국에 함양시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ITER 프로젝트는 다국적 과학프로젝트가 어떻게 목표를 달성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근경 ITER 기술고문은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소속 연구원을 비롯해 많은 한국의 연구자, 기술자들은 ITER에서 핵융합에너지 기술의 핵심 역량을 쌓고 있다"며 "이와는 별개로 대규모 국제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경험은 향후 다양한 방식으로 과학기술 역량 제고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카다라슈=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Copyright © 동아사이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