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 50주년…미국 개입 비밀문서 공개
남미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킨 칠레 군부 쿠데타가 11일(현지시간) 50주년을 맞는다. 이날 미국 언론들은 당시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며 칠레 쿠데타 50주년 기념 보도를 내보냈다. 그러나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쿠데타로 인한 상흔은 여전히 칠레 사회를 분열에 빠뜨리고 있다. 이날 칠레에서는 독재정권 희생자 추모 집회와 극우 세력의 맞불 집회가 열리면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남미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은 어떻게 붕괴됐나
1970년 극심한 빈부격차를 겪던 칠레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내세운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남미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였다.
의사 출신 정치인인 아옌데 전 대통령은 외국자본이 운영하던 구리 광산 등을 국유화하고 빈민아동 우유 무료급식과 공공근로 등 빈곤층을 위한 복지정책을 확대했다. 의료 및 교육 분야에서 강력한 사회 개혁 정책도 추진했다. 이는 칠레 상류층, 군부, 외국 다국적 기업 등의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1973년 9월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다.
쿠데타군은 공군 전투기까지 동원해 대통령궁에 폭탄을 투하했다. 취임 3년 만에 실권한 아옌데 전 대통령은 군부로부터 ‘신변 안전을 보장할 테니 외국으로 망명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망명을 선택하는 대신 대통령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17년 동안 숱한 인권 탄압을 저지르며 잔인한 독재 정권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어린이와 청소년 1000여명을 포함해 약 4만명이 감금, 실종, 살해, 고문 피해를 겪었다. 이 중 1469명은 현재까지 실종 상태다.
쿠테다가 발생한 지 50년이 흐른 지금도 실종자의 가족들은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당시 고문을 받았던 이들 중 일부는 여전히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고, 인권탄압의 상흔은 여전히 남아있다.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세계 실종자의 날’을 맞아 피노체트 독재 정권 당시 권력에 의해 실종된 사람들의 유해와 유품을 수색하기 위한 정부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칠레 국민들은 실종자의 행방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이날 보리치 대통령은 칠레를 방문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과 함께 50주년 기념 공동연설을 진행하며 중남미 민주주의 강화를 촉구했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아옌데 대통령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외국 대통령”이라면서 “우리는 역사, 형제애,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계속 세우려는 열망으로 뭉쳤다”고 말했다.
11일 칠레에선 쿠데타를 기억하고 유사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50주년 기념 행사가 열린다. 여기에는 칠레와 멕시코를 비롯해 콜롬비아, 볼리비아, 우루과이 등 중남미 국가 정상도 참석한다.
미국 국무부, 칠레 ‘쿠데타 연루’ 새로운 기밀 문서 공개
오랜기간 잔혹한 인권 탄압을 저질렀던 독재정권을 탄생시킨 군사 쿠데타에서 미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 중남미에서 좌파 정권 확산을 우려한 미국 리처드 닉슨 정부가 당시 쿠데타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칠레 쿠데타 50주년을 앞두고 최근 미국에서는 피노체트 쿠데타 당시 미국 정부가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비밀 문서가 새로 공개됐다. 지난달 25일 미 국무부는 “미국 정부는 칠레 정부의 요청에 따라 우리가 공유한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번 기밀 해제 검토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국무부가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미국은 피노체트 정권을 지지하며 쿠데타 자금을 지원했고, 미 중앙정보국(CIA)도 쿠데타 실행 과정에서 피노체트 정권에 조력했다.
미국 국가안보문서보관소는 쿠데타 발생 전 닉슨 당시 대통령이 리처드 M 헬름스 CIA 국장에게 아옌데 대통령 축출을 위한 군사 쿠데타를 선동해 ‘칠레를 구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린 사실이 담긴 문서를 공개했다고 미국 매체 악시오스가 전했다.
미국 언론들은 미국의 책임을 인정하며 칠레 쿠데타 50주년 기념 보도를 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미국이 지원한 칠레 쿠데타 50주년’이라는 인터랙티브 기사를 내보냈다. 미 공영방송 NPR도 “미국이 권위주의적 우익 독재정권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도왔다”며 상당한 분량의 기사를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이 지원한 칠레 쿠데타가 여전히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고 전했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미국 하원의원은 지난달 “칠레에서 피노체트 독재 정권 당시 일어난 일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며 “또 이러한 사건에서 미국의 역할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를 비롯한 미국 의원 대표단은 피노체트 쿠데타 50주년을 앞두고 칠레 산티아고를 방문해 독재 정권 희생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쿠데타 50주년을 맞은 칠레 사회는 여전히 극심한 혼란과 분열 상태에 빠져있다. 10일 칠레에서는 독재정권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 집회가 열렸다. 희생자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산티아고에서 50주년 집회와 행진을 이어갔고, 같은 날 극우 시위대는 피노체트 정권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최서은 기자 ciel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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