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규탄’ 빠진 G20 선언문에 러 반색···‘글로벌 사우스’ 부상에 우크라 입지 줄어드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내용이 빠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자 러시아가 자국의 ‘외교적 승리’라며 반색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이번 공동선언문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있지만, 이번 회의를 기점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온 서방과 이에 거리를 둬온 ‘글로벌 사우스’ 간 균열이 분명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가 ‘중국 견제’에 몰두하고 있는 미국 정부의 외교적 우선순위에서 차츰 밀려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러시아는 지난해 발리 공동선언문과 달리 자국을 비판하는 내용이 빠진 G20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자 “양심의 소리”라며 환영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10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는 정상회의 주제를 ‘우크라이나화’하려는 서방의 시도를 막을 수 있었다”면서 “(공동선언은) 우리의 입장을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309101656001
라브로프 장관은 러시아와 중국 대표단이 지난해 발리 선언문에서 사용된 침공 비난 문구를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으나, 서방 국가들이 이에 동의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솔직히 말해 우린 예상하지 못했다”면서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양심의 소리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이번 공동선언문이 “남반구가 더 이상 서구 열강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라고 말했다. 그는 남반구 개발도상국에 우크라이나의 입장을 따르라는 것은 “서방의 신식민주의이며 (서방은) 이번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와 달리 G20 정상회의에 초청받지 못한 우크라이나는 공동선언문 결과에 격분했다. 올레그 니콜렌코 우크라이나 외무부 대변인은 “이 문서에 (러시아를 비판하는) 강한 문구를 넣으려고 시도한 협력국에게 감사한다”면서도 “러시아의 침공과 관련해 G20은 자랑스러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비판했다.
반면 미국과 유럽 등 우크라이나의 서방 동맹국들은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빠진 이번 공동선언문의 의미를 축소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가)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러시아의 고립을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그는 “솔직히 G20은 정치적 토론을 위한 포럼이 아니다”라면서 “현지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가 중요한 진전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라고 한계를 인정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해보다 표현 수위가 낮아지긴 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G20이 “강한 목소리를 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런 평가와 달리 러시아와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남반구 일부 국가들은 더 직접적으로 서방과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차기 G20 의장국인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은 내년 11월 자국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참석한다면 체포 당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서 벌인 각종 전쟁범죄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의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이 때문에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도 화상으로만 참석했다.
브라질은 ICC 회원국으로, 원칙상 체포영장 집행에 협조해야 하지만 룰라 대통령은 “그는 체포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인도와 마찬가지로 브라질은 전쟁과 관련해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않는 비동맹 중립 외교 기조를 유지해 왔다. 동시에 중국, 러시아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룰라 대통령은 이날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것은 사실이며, 미국이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이라크를 침략한 것도 마찬가지”라면서 “브라질은 어떠한 국가에 대한 침략도 100% 반대한다”고 덧붙였다.
G20을 기점으로 확연해진 국제사회의 균열을 두고 우크라이나의 외교적 입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영국 가디언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을 확장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우선순위 목록에서 눈에 띄게 미끄러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이번 정상회의 의장국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대신 ‘글로벌 사우스’ 현안을 강조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의 ‘외교적 승리 필요성’을 존중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문제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는 것이다. 바이든 정부가 우크라이나보다 중국의 강력한 경쟁자인 인도와의 관계에 주력했다는 얘기다.
프랑스 르몽드도 ‘글로벌 사우스’ 신흥국들이 우크라이나 동맹국들을 상대로 외교적 승리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르몽드는 “서방은 러시아를 비난하지 않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중 한쪽 편에 서지 않으려는 개도국의 입장을 중시하는 타협안을 받아들였다”면서 “이런 결과는 러시아의 지속적인 고립에도 불구하고 18개월간의 전쟁 이후 서방과 ‘글로벌 사우스’ 간 새로운 세력 균형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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