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물리치기 힘든 유혹,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2023. 9. 1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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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나혜림 <클로버>
Getty Images Bank

리어카를 끌며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와 살고 있는 중학생 남자아이 현정인. 어릴 때부터 할머니를 도운 정인에게는 길을 걸을 때 땅바닥을 쳐다보며 돈이 될 만한 폐지를 줍는 습관이 있다. 일주일에 사흘은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열심히 살아도 수학여행 비용을 마련하기 힘들다.

비싼 운동화를 꺾어 신고 다니는 태주와 그 일행은 낡은 운동화를 신을 수밖에 없는 정인을 놀리고 괴롭힌다. 가난한 아이, 괴롭히는 일당들, 흔히 봐온 구도를 <클로버>는 어떻게 풀어갈까. 고양이와 검정 옷을 두른 남자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악마가 정인에게 접근해 근사한 제안을 하고, 달콤한 유혹 앞에서 정인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나혜림 작가가 쓴 <클로버>는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우선 이 소설은 여타의 청소년 소설과 달리 교양을 쌓을 만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용어는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검색 가능한 실제 용어들이다. 우선 정인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 이름 ‘햄버거 힐’만 해도 여러 정보와 함께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까만 옷을 입은 악마 헬렐 벤 샤하르, 소돔의 사과, 최고급 코스 요리, 샤토 페트뤼스 와인, 파우스트, 성경적 상황과 구절 등 책을 읽다 보면 상식과 지식을 두루 섭렵하게 된다.

 악마의 감미로운 제안을 받지만

또한 대다수 청소년 소설의 건조한 문장과 달리 음미할 만한 문장이 계속 등장해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를 들어 을씨년스러운 집 안에서 혼란을 겪는 과정을 “한 칸짜리 집에는 갈등을 넣어둘 수납공간이 없다”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햇빛은 작열하며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노동하게 하지만 달빛은 뭉근하게 뜸을 들이며 상념이라는 김을 뿜어낸다” 같은 문장이 요소요소에 박혀 있어 흥미롭게 다음 책장을 넘기게 한다.

할머니를 도우며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는 정인이지만, 무조건 착하고 고분고분한 아이는 아니다. 소비기한이 지난 빵과 패티를 사용하는 햄버거 힐 주인을 경멸하면서도 정인은 패티를 몰래 집으로 가져와 자신도 먹고 고양이에게도 데워 준다. 폐지를 모아 건넬 때마다 후하게 값을 쳐주던 고물상 박 사장이 폐짓값이 떨어졌다며 제값을 주자 정인은 이를 섭섭하게 생각한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던 영화 <부당거래>의 대사처럼.

할머니와 정인은 도움받는 걸 몹시 꺼리는데, 자존심이 아닌 자격지심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집스럽기도 하다. 그런 답답함이 악마에게 쉽게 넘어가지 않는 정인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요소가 된다.

정인에게 단 하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은 예쁘고, 공부 잘하고, 바이올린도 잘 켜는 재아와 마주하는 일이다. 친해질 기미가 보이자 정인은 자신의 처지 앞에서 망설이게 되고, 기회를 포착한 악마는 유혹의 손길을 뻗는다. 괴롭히는 태주를 응징하고 재아의 마음을 얻게 해주는 것은 물론 호화로움을 맛보게 해주겠다는 제안이다. 정인은 태주가 응징당하는 것도 싫고, 남의 도움을 받아 재아의 마음을 얻고 싶지도 않다.

 힘들어도 내 삶으로 돌아가겠다

할머니가 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을 때 정인은 악마가 만들어낸 호화로운 상상의 세계로 유인되어 달콤함에 젖어든다. 악마는 더욱더 놀라운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유혹하지만, 정인은 “모든 과정을 뛰어넘어 나 혼자 즐기기보다, 힘들더라도 어울려 살며 하나하나 이루어나갈 내 삶으로 돌아가겠다”라고 말한다. 계속 유혹하는 악마에게 정인은 할머니가 해준 “불평하면 지옥이 된다”라는 말을 들려주며 “응달에서 피는 꽃도 있다”라고 외친다.

악마가 네잎클로버, 아니 만 개의 잎을 가진 클로버를 주겠다고 다그치지만 정인은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힘든 순간, 유혹적인 순간,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 앞에 서게 된다. 그럴 때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세상은 점점 화려하고 자극적으로 변해간다. 한번 발을 잘못 들이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이근미 작가

힘들다고 다 나쁜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풍요 속에서, 더 큰 자극을 찾다가 수렁에 빠지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다. 답답하고, 괴롭고, 속 터지는 삶에 내던져진 <클로버>의 정인이 여러 선택지 중에서 어떤 결정을 하는지 찬찬히 살펴보라. 악마처럼 속살거리는 수많은 유혹 앞에서 과연 어떤 결정을 해야 할 것인가. 그런 상상을 하며 <클로버>를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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