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줄 알지만 물러설 순 없었다” 9·11 영웅들이 말하는 그날

문지연 기자 2023. 9. 1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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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CBS ‘60분’, 소방관들 이야기 특집 방송
2001년 9월 11일 뉴욕 맨해튼 남부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 /AFP 연합뉴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46분30초. 납치당한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북쪽의 제1세계무역센터(1WTC)에 충돌했다. 그리고 약 17분 만인 9시2분59초.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나란히 서 있던 남쪽의 제2세계무역센터(2WTC)를 들이받았다. 붕괴가 시작된 건 56분 후인 9시58분59초. 구조적 손상과 화재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2WTC가 먼저 무너졌다. 그다음 10시28분22초. 간신히 버티고 있던 1WTC마저 내려앉았다. 첫 충돌부터 완전 붕괴까지 걸린 시간은 딱 102분이었다.

수천 명의 희생자 중에는 당시 현장을 지켰던 343명의 소방관도 있다. 지금의 뉴욕에는 217개의 소방서가 있고 각 건물에는 22년 전 임무를 위해 떠났다가 복귀하지 못한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살아남은 동료들은 미 CBS 시사프로그램 ‘60분’에서 위태로운 건물로 뛰어들던 뒷모습을 떠올리며,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용감한 일이었다고 기억했다.

◆ “너도 70층으로 올라가라”

대대장이었던 조 바이퍼는 그날 아침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평범한 가스 누출 소동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러다 굉음에 고개를 들었는데 아주 낮은 고도로 날아가는 항공기를 발견했다. 동체에 적힌 ‘American’ 문구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눈 깜빡할 새 비극은 일어났고 소방관들은 현장에 투입됐다.

9·11 테러 당시 뉴욕 소방서 대대장이었던 조 바이퍼와 그의 명령에 따라 건물 안으로 향했던 동생 케빈 바이퍼. 동생 케빈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 CBS 시사프로그램 '60분' 영상 캡처

조 바이퍼는 건물로 뛰어들기 직전 자기 앞에 우두커니 섰던 후배 한 명을 떠올렸다. 동생 케빈 바이퍼였다. 조 바이퍼는 “내게 다가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괜찮을지 궁금해하며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고 회상했다. 형은 억겁처럼 느껴진 그 짧은 눈맞춤을 먼저 깼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동생에게 말했다. “70층으로 올라가라.” 피를 나눈 형제이자 믿음직한 동료였던 두 사람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소방관들은 75파운드(약 34㎏) 무게의 장비를 등에 업고 좁은 계단을 올랐다. 엘리베이터는 운행되지 않았고 주요 계단들도 충돌 당시 모두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 사이 ‘점퍼(jumper)’들이 확인된다는 상황실 무전도 들려왔다.

빌딩 고층부에서 극한의 고온과 유독 가스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창밖으로 몸을 던진 이들이 있었다. 약 200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을 현지에서는 ‘점퍼’라고 불렀다.

간혹 손을 꼭 잡은 커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홀로 400m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10초 이상. 시속 240㎞ 이상의 속도로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혔다. 한 여성은 죽음을 수초 앞둔 추락의 순간에도 바람에 들려 올라가는 스커트를 아래로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일부는 커튼이나 테이블보를 움켜쥐고 낙하산처럼 활용해보려 했지만, 천 조각을 쥔 사람의 손아귀 힘은 추락에 따른 엄청난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조 바이퍼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게 건물에서 떨어지거나 뛰어내린 사람들이란 걸 알았다”고 했다.

◆ “죽을 걸 알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비명과 울음으로 가득한 아수라장에서 이성을 잃지 않은 건 소방관들뿐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동료들을 대신해 말했다. 우리는 물러설 수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고. 그건 소방관이 아니라고. 그들은 또렷이 보이는 절망 앞에서 내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알았다. 수많은 동료를 잃을 거라는 것도 직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이 분명할수록 그들은 의심할 게 없었다.

뉴욕 소방서에 걸려있는 기념비. 9·11 테러 당시 희생된 소방관들을 기린다. /미국 CBS 시사프로그램 '60분' 영상 캡처

당시 후배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피터 헤이든도 그랬다. 그는 “우리가 불을 완벽하게 끌 수 없을 거란 걸 알았다. 충돌 당시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이미 죽거나 죽은 목숨이라는 것도 알았다”며 “그래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수색하고 대피시키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임무를 받아들던 동료들의 눈빛이 기억난다고 했다. 소방관들은 서로를 껴안았고 그런 다음 위로 향했다.

브루클린 본부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방서였다. 그곳을 이끌던 피터 간시(54)는 33년 경력의 베테랑이었고 늘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한번은 “1만1000여명의 소방관들은 내 자식과 다름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는 그날 현장에서 믿고, 아끼고, 사랑하던, 자식 같은 동료들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9·11 테러 당시 브루클린 본부 책임자였던 피터 간시(위)와 그의 두 아들. 이들은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방관으로 일하고 있다. /미국 CBS 시사프로그램 '60분' 영상 캡처

피터 간시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다. 그의 딸은 소방관과 결혼했고, 당시 사업을 하며 MBA 과정을 앞두고 있던 아들은 진로를 바꿔 소방관이 됐다. 생전 피터 간시는 소방학교를 갓 졸업한 후배들에게 “너희들은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항상 행복할 것”이라는 말을 해왔다고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 말을 지금의 자리에서야 비로소 이해한다.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미소를 지으며 집에 돌아오겠어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나의 아버지를 오랜 세월 이끌어 온 원동력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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