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빌라 비극 왜 못 막았나…허술한 복지 시스템 보완 절실(종합)

나보배 2023. 9. 1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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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정 확인 공무원 단 1명…사고 징후에도 막지 못하는 구조
공과금·건강보험료 장기 체납…출생 신고도 안 한 것으로 확인
위기가구 통보에도 확인 못 해…공무원 1명이 550명 확인했어야
"복지 예산 증가에도 깔때기 현상 심화…전담 인력·지원 늘려야"
기저귀 상자만 덩그러니 (전주=연합뉴스) 정경재 기자 = 9일 네 살배기 아들을 남겨두고 숨진 40대 여성이 살았던 전북 전주시 한 빌라 현관문 앞. 아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저귀 박스가 놓여 있다. 2023.9.9 jaya@yna.co.kr

(전주=연합뉴스) 정경재 나보배 기자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신동의 한 빌라에서 일어난 모자(母子)의 안타까운 사연으로 우리 사회 고질적 문제인 '복지 사각지대'가 다시 드러났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한 '송파 세 모녀'와 희소병을 앓다가 숨진 '수원 세 모녀' 비극을 겪은 이후에도 위기가정 발굴을 위한 행정의 노력은 턱없이 모자랐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예산을 늘리는 것보다 어려운 이들에게 알맞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전담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무원 주민센터당 단 1명…"사실상 위기가구 확인 불가"

11일 연합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아들을 홀로 두고 여성이 숨진 빌라가 있는 서신동 주민센터에서 위기가정 확인을 담당하는 공무원은 단 1명이다.

이 공무원은 보건복지부에서 전기세나 건강보험료 등을 체납한 '위기가구 발굴대상자'를 통보하면 가정 형편을 확인하는 역할을 맡는다.

지난 7월 서신동 주민센터에는 A씨가 포함된 위기가구 4차 발굴대상자로 87명이 통보됐다. 1∼3차 발굴대상자까지 합치면 올해에만 모두 550명이 추려졌는데 1명의 공무원이 2개월여 만에 일일이 발품을 팔면서 내용을 확인해야 했다.

이 공무원은 A씨가 발굴 대상자로 확인되자 안내문을 발송했고, 이후 전화를 받지 않자 그가 부재해 가정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해 생활 상태를 확인하지 못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주민센터 관계자는 "주민센터에 여러 명의 사회복지직 공무원이 근무하고 있지만 장애인복지와 의료급여, 기초연금, 노인 연금 등 관련 업무가 많기 때문에 위기가구 발굴은 1명이 맡고 있다"며 "게다가 한 번 접촉으로는 대상자와 연락이 닿지 않은 경우가 많아 여러 번 연락해야 해 업무가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민센터에서 사실상 공과금 체납 사유를 알아보는 것 외에 자체적인 위기가정 발굴은 어려운 구조다.

주변에 어려운 주민이 있다는 통장이나 이장 등의 신고가 들어오면 하면 확인 후 지원하는 식인데 당연히 전문성이나 체계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주민센터 관계자는 "동에서 위기가구를 발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공무원이 일일이 방문하며 전수조사하기도 어렵고 개인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지자체에서 공과금 체납 현황을 알아보기도 불가능하니 복지부 통보 자료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지 사각지대 (PG) [정연주 제작] 일러스트

사고 징후 있었지만…사후 모니터링도 못 해

인력이 부족해 위기가구 사후 모니터링 또한 행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A씨가 위기가구 발굴대상자에 오른 것은 2021년 5월이다. 당시 건강보험료와 통신비, 가스비 등이 체납돼 5월부터 12월까지 4차례 위기가구 발굴대상자 명단에 올랐고, 이후 수익이 발생해 명단에서 제외됐다가 지난 7월 다시 발굴됐다.

이번에도 건강보험료와 관리비가 체납돼 발굴대상자 명단에 포함됐다. A씨는 가스비를 내지 않아 지난 5월 이후로 가스가 끊겼고, 건강보험료는 무려 56개월이나 내지 못해 체납액이 118만6천530원에 달했다. 매달 5만원씩인 많지 않은 관리비도 반년간 밀린 것으로 확인됐다.

2021년 12월 이후 발굴 대상 목록에서 제외된 A씨가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지 한 번만이라도 살펴봤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그를 살필 여유가 있는 공무원은 없었다.

전주시 관계자는 "2022년에 위기가구 발굴대상자에 오르지 않아 '발굴 종결' 처리가 된 사례로 알고 있다"며 "올 한해에만 전주시에 1만명 가까운 발굴대상자가 통보됐는데 이를 다 확인하기도 벅차다"고 설명했다.

2022년에도 건강보험료가 체납됐지만 발굴대상자 명단에서 빠진 것에 대해서는 복지부는 건강보험료 미납만으로는 발굴대상자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해명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사회복지 공무원 인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 가지 항목만 체납된다고 해서 지자체에 명단을 내려보내지 않고 있다. 39가지 위기 징후 여러 개가 중복될 때 위기관리 대상자로 분류한다"며 "게다가 건강보험료는 상습 체납자가 많은 항목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우편물만 켜켜이 (전주=연합뉴스) 정경재 기자 = 9일 네 살배기 아들을 남겨두고 숨진 40대 여성이 살았던 전북 전주시 한 빌라 입구. 우편함에 공과금 고지서가 보인다. 2023.9.9 jaya@yna.co.kr

실현되지 못한 복지 제도…"'깔때기 현상' 해소 방법 찾아야"

경찰에 따르면 A씨는 가족 간 채무가 있고, 최근 마땅한 일자리를 갖지 못해 소득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A씨는 지난 8일 오전 9시 55분께 "세입자가 보이지 않고 개 짖는 소리가 난다"는 집주인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119구급대원에 의해 발견됐다. 여성의 곁에는 생후 20개월 전후로 추정되는 그의 아들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아들은 수일간 음식물을 먹지 못 해 쇠약한 상태였으나 병원 치료를 통해 의식을 되찾았다. 이 아이는 출생 신고가 돼 있지 않아 신원 확인이 어려워 정확한 나이를 파악하는 데 혼선이 있었다.

A씨 사망 원인은 부검을 통해 '동맥경화'로 잠정 결론 났다. 시신에서는 담석도 발견됐는데, 여성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생활고 탓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수원 세 모녀 비극을 계기로 "복지정보 시스템 작동이 되지 않는 곳이 없도록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며 정부 부처와 각 지자체에 철저한 대책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여 만에 전주에서 재차 되풀이된 모자의 비극으로 우리 사회 복지 시스템을 다시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게 됐다.

전북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이상록 교수는 "각종 제도가 있다고 해도 이들 모자에게까지 미치지 않아 비극이 또 발생했다"며 "정부의 복지사업과 예산은 늘어나고 있지만 현장 인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복지가 실현되지 못하는, 흔히 말하는 '깔때기 현상'이 더 심화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회서비스가 꼭 필요한 이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전담 인력을 늘려야 한다"며 "사회 경직성이 강화될 것이 우려돼 공무원을 추가 채용하기 어렵다면 공무직이나 공공근로 등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jaya@yna.co.kr war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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