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면접 다수 의견에 고건 총리 반대…3순위, 장관 돼
김영진 농림장관, 사의표명·잠적
대통령 반려에도 사퇴 뜻 안꺾어
총리와 청와대 참모진까지 8명
후임 농림장관 후보 셋 심야면접
6명이 민병채 전 양평군수 지지
고건 총리는 박상우 전 차관 밀어
타협 안되자 결국 허상만 후보로
대학 강사 시절 황태성 사건 연루
3년 옥고 치른 김민하 새만금위원장
‘황태성은 간첩 아니라 밀사’ 강조
[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32화 심야 장관 면접
2003년 7월15일(화) 서울행정법원이 새만금 사업 중단 결정을 내려 충격을 주었다. 다음 날 오전 김영진 농림장관이 판결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휴대폰을 끄고 잠적해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장관 잠적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나중에 밝혀지길 김 장관 부부는 어느 기도원에 숨었다고 한다. 5·16 새벽 갈멜수녀원에 숨었던 장면 총리를 연상시킨다.
그날 오후 5시 대통령 주재 첫 인사회의에 유인태, 문재인, 권오규, 이해성, 정찬용과 내가 참석했다. 김 장관이 사법부 판결을 강력히 비판한 성명을 발표했으니 사표를 수리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유인태, 정찬용은 사표 반려를 건의해 5:2로 의견이 갈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에는 사표 수리 쪽으로 기울어 후임 후보까지 검토했으나 뾰족한 대안이 없자 사퇴철회 권고로 결론 내리고 인사보좌관에게 김 장관의 진의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 장관은 사의를 굽히지 않았다.
7월21(월) 아침에 이어 23일(수) 아침 7시 관저 조찬 모임이 연달아 열려 후임 농림장관 인사를 의논했다. 후보는 1안 민병채, 2안 허상만(순천대 농대 교수)으로 압축됐는데 노 대통령은 인사보좌관에게 1안으로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민병채는 육사 17기 출신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기업체 사장도 했고, 특히 양평군수로 7년간 재임하면서 양평을 유기농업의 메카로 키운 사람이다. 업무 추진력과 장악력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희상 비서실장은 민 군수에게 군수 3선을 권유했으나 거절해서 섭섭하다고 하면서도 장관 맡는 것은 좋다고 찬성했다.
이날은 마침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라 저녁때 아내와 광화문 교보생명 앞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결혼기념일 저녁식사를 했다. 전국이 온통 한일 축구 응원 열기로 뜨거운 밤이었다. 아내는 버스로 귀가하고 나는 걸어서 청와대로 복귀했다. 밤 9시 심야 농림장관 후보 면접이 비서실장실에서 열려 고건 총리, 문희상 실장, 유인태, 문재인, 정찬용, 이해성, 박주현, 나까지 8인이 면접관 역할을 했다. 민병채, 박상우(총리 추천, 전북), 허상만 순서로 면접을 봤다. 개량한복 차림으로 등장한 민병채 후보는 소탈하고 욕심 없는 인상을 주었다. 사장과 군수 재임 때 노동자, 농민과 대화를 많이 했다고 한다. 박상우 후보는 30년간 농림부에 근무하며 차관을 거쳐 농업경제연구원 원장까지 역임해 농업 전문성은 단연 발군이었다. 들어오자마자 면접관들에게 90도로 절하고는 농업 전문지식을 과시했다. 순천대 교수였던 허상만 후보는 태도가 조용하고 말도 차분히 했다. 개별 면접을 마치고 8인이 각자 의견을 말했다.
유인태 수석은 중립을 선언했다. 문희상 실장은 민 후보가 좋았는데, 면접 뒤 박 후보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나를 포함한 6명은 대체로 민 후보, 허 후보를 지지하면서도 민 후보 쪽이 좀 더 지지가 높았다. 대세가 민 후보로 기울자 중립이었던 유인태 수석도 “참여정부 장관 중 사관학교 졸업생이 전무했는데, 민병채 후보가 장관 되면 그걸 벗어나는 효과가 있겠다”며 거들고 나섰다.
그러나 고건 총리는 호남 민심 등 세가지 기준을 들어 박 후보라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에게 회의 결과 전달자로 문재인 수석은 ‘위험’하니(객관적, 중립적이지 않다?) 총리 혹은 비서실장이 전달할 것을 요구했다. 회의가 끝난 뒤 우리끼리 모여 재론 끝에 민 후보가 좋겠는데 장관제청권을 가진 총리의 뜻이 저리 강하니 도저히 안 되겠고, 허 후보로 갈 수밖에 없겠다고 결론 내리고 자정 넘어 귀가했다. 이날은 농림장관 인사 문제로 아침 7시부터 17시간 근무했다. 3시간 진행된 심야 장관후보 면접은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지 싶다. 귀가하면서 유인태 수석이 “다시는 이런 방식으로 하지 말자”고 말했다. 결국 허상만 후보가 농림장관에 임명됐다.
9월2일(화) 오후 3시 새만금 회의가 집현실에서 열렸다. 고건 총리, 새만금사업특위 공동위원장 김민하(2023년 7월 89세를 일기로 타계) 전 중앙대 총장과 정세균 민주당 정책위의장, 허상만, 한명숙, 이창동, 권기홍 장관, 청와대에서는 문희상, 유인태, 문재인, 그리고 내가 참석했다. 허상만 장관과 정세균 정책위의장의 보고에 이어 이창동, 한명숙 장관의 대안 보고가 있었다. 노 대통령은 세차례나 화를 냈다. 한 장관이 “환경단체와 협의했고 그쪽도 받아들이는 대안”이라고 말하자 “왜 환경단체에 국정을 허락받아야 합니까?”라고 따졌다. 허상만 신임 농림장관에게는 “너무 농업기반공사 입장에 서면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을 세뇌하려고 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정세균 정책위의장에게는 전북도민 입장에 너무 기울어 있다고 비판했다. 남은 2공구 2.7㎞ 공사를 개방식, 갑문식 어느 쪽으로 하느냐의 문제는 기술적으로 검토할 사항이 많아 결정하지 못한 채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겠다”는 김민하 공동위원장의 마무리 발언으로 회의가 끝났다.
회의를 마치고 현관에서 내가 김민하 위원장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1963년 간첩으로 몰려 사형 집행된 황태성에 관해 질문하니 “같은 상주 사람이고 먼 친척”이라고 했다. 황태성 사건 때문에 자기는 젊을 때 3년 징역살이를 했고 출옥 후에도 계속 감시, 박해받고 아무것도 못 했다며, ‘황태성은 간첩이 아니고 밀사’임을 특히 강조했다.
상주 사람 황태성(1906~1963)이 누구인가? 그는 일제 강점기 제1고보(현 경기고) 재학중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했고, 연희전문을 중퇴했다. 공산당 활동으로 여러 차례 체포돼 6년 이상 옥고를 치렀다. 1946년 대구 10·1사건 주동자였고, 박정희가 존경했던 셋째 형 박상희와 단짝 동지였다. 해방 후 쌀이 부족해 대구시민들이 시청에 몰려가 데모할 때 시청 2층 발코니에 황태성이 나타나 “공산당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니 시민들이 일시에 조용히 경청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당시에는 시민들 사이에 공산당, 좌익이 끝까지 독립운동한 데 대한 존경심이 있었다. 그 발코니는 현재 대구시의회 건물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뒤 황태성은 체포를 피해 월북하여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을 지냈고, 폐병에 걸려 쉬던 중 5·16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황태성은 자기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인 박정희와 김종필(박상희의 사위)이 한때 좌익이었는데 통일 의지가 있는지 가서 물어보겠다고 김일성에게 제의했다.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김일성이 말렸으나 황태성은 늙고 병들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우겨 군인들 등에 업혀 휴전선을 넘어 내려왔다. 서울에서 처음 찾아간 사람이 친척인 중앙대 강사 김민하였다. 이어서 구미에 살던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황태성이 중매 서서 결혼)에게 편지를 써서 박정희, 김종필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실패했다.
황태성은 체포돼 2년 이상 감옥에 있었다. 감옥에서도 그는 주위 죄수들에게 자기는 간첩이 아니고 북한에서 내려온 밀사라고 거듭 말했다. 황태성은 간첩죄로 1963년 연말 인천 해변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 ‘민족의 완전 자주독립과 남북통일 만세’를 세번 외치고 죽었다. 식민지와 분단 조국의 멍에를 온몸에 짊어진, 마치 영화 같은 황태성의 일생에 관해서는 김학민·이창훈 공저,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푸른역사, 2015)를 읽어보시라. 이 책에 하도 놀라운 내용이 많아 이창동 감독에게 영화로 만들어보라고 권했는데 이창동 스타일이 아니라 성사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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