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행성 이름으로 부활한 19세기 천문학의 두 여자거성

강진욱 2023. 9. 1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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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현상 발견·분석…연구결과 대부분 남성에 헌납
"하늘 한자리 차지할 자격"…학계의 뒤늦은 과거 바로잡기
소행성으로 부활한 영국 여성 천문학자 몬더(왼쪽)와 에버렛 [위키피디아 캡쳐. DB 및 재판매 금지]

(서울=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 초창기 영국의 천문학 발전에 적잖은 공헌을 하고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을 인정받지 못한 채 스러져간 여성 천문학자 2명이 소행성 이름으로 부활했다.

학계에서 여성의 기여도가 아예 인정받지 못하던 19세기 영국에서 맹활약한 애니 몬더(1868∼1947), 앨리스 에버렛(1865∼1949)의 얘기다.

10일(현지시간) 영국 거튼대와 일간지 가디언 등에 따르면 국제천문학연맹(IAU)은 카탈리나천체탐사(CSS), 영국천문학협회(BAA)와 함께 소행성 2개에 이들 두 학자의 이름을 붙였다.

친구로 알고 지내던 두 여성은 보잘것없는 임금을 받고 천체를 기록하는 궂은일을 도맡았다.

이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과학적 업적을 남자 동료들에게 넘기고 과학자로서 뚜렷한 위상을 지니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영국천문학협회의 천문사 담당 국장인 마이크 프로스트는 "비범한 일을 한 비범한 여성들"이라며 "하늘 위에 한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평가했다.

몬더와 에버렛은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을 통과했음에도 학위를 받지 못했다. 케임브리지에서는 1948년이 돼서야 여학생들에게 학위를 주기 시작했다.

프로스트 국장은 이들 둘이 졸업 후 그리니치의 영국왕립천문대에 '여성 계산요원'이라는 직함으로 들어가 별의 위치를 측정하고 이를 도표화하는 일을 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영국왕립천문대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나오는 여성 중에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인재들이 있다는 점, 이들을 값싸게 고용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당시 환경을 설명했다.

거튼대에서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히던 몬더는 월급 4파운드로는 생계를 꾸려가기 힘들다며 임금 인상을 간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그 돈으로는 살기가 힘들다"며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수학 우등생이었다는 사실이 무의미한 것이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에버렛과 몬더(오른쪽) [거튼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가장 큰 태양 흑점을 발견한 몬더는 상사인 에드워드 월터 몬더와 결혼한 뒤 강제로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몬더는 자신보다 17살이나 많았고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홀아비였던 남편의 자원봉사 조수로 계속 일했다.

남편과 함께 전 세계를 탐사하다가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현상인 개기일식을 사진에 담는 데 성공했다.

프로스트 국장은 "이는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며, "그녀는 매우 재능 있는 천문학자이자 태양 사진작가였다"고 말했다

몬더는 오늘날 태양흑점을 분석하는 나비도(butterfly diagram)를 남편과 함께 창안했으나 그 업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나비도는 태양 흑점이 나타나는 위도가 태양 주기에 따라 바뀐다는 점을 보여주는 도표로 오늘날까지 널리 응용되고 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여러 권의 천문학 서적을 출간했으나 책에 남편의 이름만 들어가는 때가 잦았다.

월터는 당시 널리 읽힌 한 공동저서의 서문에서 "거의 전부 아내가 썼다"고 인정한 바 있다.

몬더는 1916년까지는 남성 전용이었던 왕립천문학회의 회원 지위를 얻지 못해 논문을 발표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흑점의 비대칭적 속성에 대한 자신의 발견도 남편의 지위를 빌려 세상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몬더는 거튼대 기금으로 사진기를 구입해 당시로서는 최장인 1천만㎞까지 뻗어나간 태양 빛줄기의 증거를 포착했다.

에버렛도 한 해에 2만 2천개의 별을 관찰해 위치를 측정하고 별 궤도에 관한 두 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 생계가 어려웠다.

주요 천문대가 일자리를 제안했다가 여성에게 직위를 허용할 방법을 끝내 못 찾아 철회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에버렛은 어떤 역경이 자신의 길을 막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에버렛은 35세 때 광학과 관련한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해 1903년 런던물리학회(PSL) 저널에 논문을 쓴 최초의 여성이 됐다.

그는 1925년에 은퇴 전까지 국립물리학연구소(NPL) 물리학자로서 두번째 경력을 시작했다.

나아가 60세에는 전기 공학자로서 초기 TV 기술의 선구자로 우뚝 서기도 했다.

에버렛은 텔레비전 발명가인 존 로기 베어드와 함께 TV 광학과 관련된 공동 특허권 신청에 성공했고 1926년 첫 TV 영상 시연에 참석했다.

거튼대 여성 총장인 엘리자베스 켄달은 몬더와 에버렛에 대해 "자기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고 평가했다.

켄달 총장은 소행성에 에버렛과 몬더의 이름이 붙은 데 대해 과거 잘못을 바로잡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영감을 주는 사건이라고 해설했다.

kjw@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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