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광장] ‘밥’이 이념이요, 신앙이었던 사람들
“제 할아버지는 볼셰비키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부유한 지주계급이라 해서 공산당한테 끌려가 5년이나 감옥에 있다가 풀려 나왔어요. 그런데 할아버지 맏사위인 제 큰고모부는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무려 10년이나 수감생활을 했지요.”
미라 최 선생은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이주해온 지 20여년 된 고려인 3세다. 이땐 공산당에 치이고, 저땐 일제에 곤욕을 치른 비운의 가족사를 가슴 한쪽 품어 안고 사는 여인이다.
원래 연해주 지역 일대는 고구려, 발해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던 것이 제정러시아의 동진정책 과정에서 1860년 11월, 러시아·청 베이징조약에 따라 러시아 영토로 편입됐다. 우리 민족은 이때부터 왕래와 이주에 있어서 러시아 정부 통제하에 들어갔다. 초기에 함경도에서 13가구의 수십명이 두만강을 건너 이주를 시작했던 것이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무렵에는 20여만명으로 증가해 있었다. 현재 고려인 동포 숫자는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 구소련권 지역을 중심으로 약 55만명인 것으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한국에는 10여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해주 고려인 동포의 디아스포라 160여년의 역사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80여년에 걸친 연해주 시대이고, 두 번째는 중앙아시아 시대 50여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고국 정착시기 등 30여년의 세월이다. 그들의 삶은 러일전쟁, 조선의 멸망, 조선독립운동 전성기, 공산 볼셰비키혁명, 일본군 시베리아 연해주 점령, 일본군의 중국 침략, 독재자 스탈린에 의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구소련의 와해 등 시대적 격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연해주 시절에는 이방인으로서의 신분 차별, 유럽으로부터 이주해온 러시아인들에 의한 농지 강탈, 일본군이 자행한 독립운동의 본거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에 대한 고려인 대량 학살, 일본군 어용단체 ‘민회’ 강제 가입과 일본군 철수 후에 몰아닥친 볼셰비키 혁명군의 고려인 친일파 색출, 그리고 이어지는 공산당 중앙 지침에 따른 고려인 파르티잔에 대한 숙청, 마지막으로 1937년 17만여명에 달하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의 강제 이주.... 볼셰비키 혁명기에 누구는 제정러시아 편에 섰고, 누구는 공산 볼셰비키 편에 섰다. 일본군 점령 시절에 파르티잔이 돼 일본군과 싸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하며 돈을 버는 사람도 있었다.
중앙아시아 이주 시대에는 현지인화, 즉 수처작주(隨處作主)만이 살 길이었다. 이주 초기의 삶은 이동과 이주의 자유가 엄격하게 제한된 사실상 ‘강제 집단수용소’ 생활과 다름아니었다. 독재자 스탈린이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 후르쇼프가 들어서자 비로소 우리 고려인 동포에게 이동과 거주의 자유가 허용됐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집단농장 콜호즈의 농업 부문에서 고려인 동포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농업영웅’들이 다수 탄생해 타 민족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한편 우리 민족 특유의 생존방정식이 발동되기도 했다. 가족, 일가친척, 이웃들이 15~20명씩 무리지어 우크라이나 등 소련 각지의 비옥한 땅을 찾아 이동해 양파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고려인 동포가 수확, 판매한 양파가 소련 전체의 70%나 차지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이를 ‘고본질’이라고 부른다.
지난 1991년, 거대한 공산제국 소련이 붕괴되는 사변이 일어났다. 중앙아시아에 독립 열풍이 몰아쳤다. 고려인 동포사회에 불어닥친 세 번째 변화였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배타적 민족주의가 횡행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바뀌자 고위직은 그들의 차지였다. 이권 사업도 그들의 몫이 됐다. 러시아인들은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 고려인들은 마땅히 돌아갈 곳이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내리며 50여년간 일궈놓은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새삼 ‘이방인’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미라 김 선생 가족은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조상의 땅,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아버지가 소련 정보기관 KGB 우즈베키스탄 책임자였던 미샤 씨도 가족을 이끌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현재 경기도 안산에 정착했다. 뾰트르 박 씨는 중앙아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주해갔다. 우크라이나인이 돼서 우크라이나 남부지역 전쟁터에서 전쟁구호물자 업무를 담당하며 한국과의 소통을 활발하게 전개 중이다.
고려인 동포는 고비고비 변화되는 정세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사투를 벌여야만 했기 때문에 어느 한 시기 평온할 날이 없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밥’이 이념이요, 신앙인 사람들이다.
요즘 우리 고려인 동포사회가 동요하고 있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으로 불거진 색깔 논쟁과 이념 갈라치기 때문이다.
고려인 동포에게 홍범도 장군은 일제로부터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준 영웅이자 정신적 지주다.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며 “공산당원이었던 돌아가신 내 부친도, 옛 소련에서 태어나 인생의 절반을 소련 체제 속에서 살았던 나도 제거 대상인가. 공산당도, 소련도 더는 존재하지 않은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면서 따끔하게 질책한다. 굳이 흉상을 옮기겠다면 대통령 공약 사항인 육사 이전시기에 맞춰서 충분한 여론수렴 과정을 거쳐 대응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021년 6월 김좌진·홍범도 장군이 진두지휘했던 청산리·봉오동전투 100주년을 맞아 세운 우당기념관 개관식에서 정치인으로서 첫 번째 공개 행보를 시작했다. 이어 같은 달에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했다. 대통령 출마 선언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해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열 가지 중 아홉 가지 생각은 달라도, 한 가지 생각...(중략)...국민이 진짜 주인인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같이하는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국민 모두를 다 품고 가겠다는 ‘톨레랑스 선언’이었다. 그때의 ‘전 검찰총장 윤석열’과 지금의 ‘대통령 윤석열’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장준영 헤럴드 고문 (전 한국항공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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