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대나무 외교’, “강대국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내 길을 간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9월10일 베트남 방문을 계기로 한때 처절한 전쟁을 벌였던 양국 사이의 외교관계가 최상급(포괄적, 전략적 동반자)으로 격상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베트남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을 유지하는, 전통적 ‘대나무’ 외교 전략을 폐기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베트남은 미국과 훈훈하게 외교관계 격상을 논의해온 지난 몇 개월 동안 러시아로부터 비밀리에 무기를 사들여 자국의 군사 시스템을 현대화하는 계획을 추진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뉴욕타임스〉(9월9일)가 제시한 베트남 재무부 문건(지난 3월 이 나라 정부 내에서 회람)에 따르면, 베트남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매입하고 그 대금을 시베리아 소재 합작(러시아-베트남) 석유회사를 통해 결제하는 방안을 논의해왔다. 이 합작 석유회사의 베트남 측 계정에서 러시아 측 계정으로 자금을 이체하는 방법으로 미국 등 국제사회의 감시를 따돌리려 한 것이다.
미국과 UN은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계기로 러시아를 ‘무기 금수국’으로 지정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러시아와 무기를 거래하는 나라나 기업은 국제 제재를 받게 된다.
외로운 러시아와 무기 거래를 추진한 이유
베트남이 국제 제재 위험까지 무릅쓰며 러시아 무기를 매입하려 한 가장 큰 이유는,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위협 때문이다. 중국은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 해상으로 들어오는 다른 나라 선박이나 비행기를 위협해왔다. 베트남 입장에선 자국의 해상 국경이 침범받고 있다. 그래서 지난 수십 년 동안 긴밀한 군사협력을 유지해온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아 자국의 군사 시스템을 현대화하려 시도했다. 미국의 러시아 무기 금수 조치로 이 계획의 실행이 어려워지자 비밀 거래를 추진해온 것이다.
베트남 재무 차관이 서명한 이 비밀 ‘문건’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적혀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밝혔다. “우리 당(베트남 공산당)과 국가는 여전히 러시아를 국방과 안보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 러시아가 전방위적으로 서방 국가들의 금수 제재를 받는 시기에 새로운 무기 거래를 통해 러시아와 전략적 신뢰를 강화할 수 있다.”
이 문건이 회람된 직후인 지난 5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전 대통령이자 전 총리)이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했다. 베트남과의 무기 거래를 마무리하기 위한 회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은 한 나라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베트남이 자국의 군사‧외교 전략을 러시아 같은 하나의 강대국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몰고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내다봤다. 베트남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 무기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전부터 이스라엘, 체코 등의 업체에 무기 매입을 타진하는 등 다각화를 타진해왔다. 지난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가 최악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베트남은 러시아에서 구축함, 우크라이나에선 그 부품을 조달했다.
바이든의 이번 방문으로 미국-베트남 외교관계가 격상된다면, 베트남은 미국은 물론 그 동맹국인 한국으로부터도 무기를 매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심지어, 베트남이 러시아와 비밀 무기 거래를 추진한 이면에도 베트남 나름대로의 다른 속셈이 있었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베트남 재무부 문건은, 미국이 러시아 무기 매입 때문에 베트남에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이 문건은 미국이 실제로 그런 조치를 강행할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다. 중국 봉쇄를 위한 미국의 청사진인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하노이(베트남)이 가진 파트너로서의 가치 때문이다.”
베트남 자신의 길
〈뉴욕타임스〉는 한 안보 전문가의 말을 빌려, 베트남이 강력한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유연한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 :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휘어질망정 부러지진 않는다는 의미)를 펼쳐왔다고 썼다. 베트남은 한 강대국과 우호 관계를 맺을 때 다른 강대국에도 악수를 청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문가들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하노이 방문에 이어 중국 시진핑 주석과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올해 베트남을 방문할 것으로 예상 중이라고 한다.
“(지난 20세기 중후반의) 25년 동안 세 침략자(프랑스, 미국, 중국)를 물리친 (인구 1억명의 국가) 베트남은 초강대국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것이, 베트남의 비밀 협상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평가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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