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민 얼굴에서 클라크 게이블이 보인다
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MBC 금토 드라마 '연인'(극본 황진영, 연출 김성용)이 지난 9월 2일 10회 방송을 끝으로 일단 휴식에 들어갔다. '파트 1'을 마무리 짓고 10월 중에 나머지 10회로 구성된 '파트 2'로 돌아올 예정이다.
수많은 화제 속에 10회는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닐슨코리아 집계에 따르면 전국 기준 12.2%에 달했다. 같은 시간대 경쟁 드라마인 SBS의 '소방서 옆 경찰서 그리고 국과수'(6.5%), JTBC 토일 드라마 '힙하게'(7.0%)보다 높았다. 코믹과 멜로에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배경까지 실감 나게 버무린 서사, 감각적인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이 잘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다.
'연인'은 근래 보기 드문 '특이한' 사극 드라마였다. 처음엔 코믹으로 시작했다. 영화 '관상'이나 '해적: 바다로 간 산적'과도 같은 경쾌한 톤. 남녀 주인공 유길채(안은진)와 이장현(남궁민)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도입부터 그런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미모와 재치를 겸비한 사대부가의 규수 유길채는 능군리 마을 젊은 선비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주인공이다. '조신(操身)'함으로 대변되던 조선 시대 전통적 여성상과는 달리, 타고난 연애 '밀당 스킬'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이 보통을 넘는다. 그러나 그의 진짜 마음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 향해 있다. 마을의 소문 난 모범생이자 성균관 유생인 남연준(이학주) 도령이다. 시대적 배경이 17세기 초일 뿐 자기 주장이 확실하고 당돌한 현대 여성상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정통 사극에서 그동안 못 보던 캐릭터다.
어느 날 갑자기 능군리에 나타난 미스터리 남자 이장현은 한술 더 뜬다. 분명 갓 쓰고 두루마기 걸친 양반인데 근엄한 체면 따위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선비들의 허세를 조롱하고, 지나치게 장삿속에 밝다. 게다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비혼(非婚)' 주의자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그러나 닳고 닳아 보이는 그에게도 연인에 대한 순정은 곡진하다. '여우' 같은 유길채의 진가를 꿰뚫어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로맨스가 펼쳐지려는 때, 돌연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우리 역사의 치욕적인 순간인 병자호란(인조 14년·1636년)이 발발한다. 이때부터 '연인'은 코믹이나 로맨스 대신 비장한 전쟁사극으로 탈바꿈한다. 밝고 화사했던 화면은 금세 어둡고 긴박해진다.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피란 행렬이 이어진다. 고향을 등지고 강화도로 향하는 유길채 일행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도중에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때마다 무술에도 능한 이장현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실리주의자' 이장현은 평소대로라면 오랑캐와의 대결 대신 '비즈니스'를 선택했을 터. 하지만 연인 유길채를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쓴다.
이 와중에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와 소현세자, 고위 관료들의 이야기는 익히 아는 바와 같다. 오랑캐의 침입에 두려워하는 왕, 왕을 대신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 그리고 주화파와 척사파로 분열돼 갈등하는 조정의 대신들. 마치 영화 '남한산성'을 옮겨놓은 듯한 장면들에 또 한 번 마음이 쓰라리다. 청나라 태종 앞에 임금이 머리를 조아린 '삼전도의 굴욕'을 어찌 잊으랴.
하지만 벼랑 끝 암흑의 시대에도 인간의 모진 삶은 계속된다. 전쟁이 끝나고 유길채 일행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청나라에서 활동하던 이장현도 다시 능군리를 찾는다. '파트 1'의 마지막 10회에서는 유길채와 이장현이 참혹한 전쟁을 딛고 살아남아 비로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또다시 두 사람을 갈아놓는다. 비록 갖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코믹 로맨스에서 전쟁으로 장르를 뛰어넘는 창의성, 유길채와 이장현의 맺어질 듯 맺어지지 않는 기구한 러브 스토리의 독특함은 그대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최근 논란에 빠져 있다. 바로 눈치 빠른 시청자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미국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의 유사성이다. 이전까진 독특함이라고 여겼던 최고의 매력이 돌연 표절 시비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마가렛 미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고전 명작이다. 이 작품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봉했지만 작품성이나 흥행면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수많은 관객들이 봤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트로피를 휩쓸었다. 1861년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도도하고 주체적인 여자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와 바람둥이 같은 실용주의자 레트 버틀러(클라크 게이블)의 엇갈린 사랑과 인생 역정을 대서사시로 보여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연인'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이에 적지 않은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캐릭터가 너무 닮아 있다. 당돌한 유길채는 조선 시대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한다. 남북전쟁 이전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남부 대농장 시대의 오하라와 완벽하게 포개진다. 스스로 "나는 잡놈"이라고 하는 이장현도 요즘 말로 '나쁜 남자' 스타일의 버틀러와 매우 닮았다. 유길채가 짝사랑하는 남연준 도령은 오하라가 애정을 품은 애슐리 윌크스를 연상시키고, 윌크스가 결국 오하라의 사촌인 멜라니와 결혼하는 것도 유길채의 절친이자 현모양처의 표상 경은애(이다인)가 남연준과 이어지는 것과 똑같다.
대략적인 줄거리도 닮아 있다. 최초의 로맨스가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적 터닝 포인트로 인해 엇갈리는 게 같다. '연인'의 병자호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남북전쟁은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신뢰를 더욱 깊게 만드는 시련이다. 전쟁 후 귀향한 유길채가 가족과 지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점은 오하라를 절로 떠올리게 한다. 오하라가 제재소 등을 운영하며 부를 일구는 것이나, 유길채가 유기 그릇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돈을 버는 과정이 매우 비슷하게 펼쳐진다.
대본을 쓴 황진영 작가는 애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인정한 바 있다. 그는 "병자호란, 4·3사건, 동학농민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비극적 상황에 내동댕이쳐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던 것 같다. 병자호란 같은 경우 독한 패배의 역사이기에 쉽게 손대지 못했는데 고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영감을 받아 고난의 역사를 조금은 경쾌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영감 정도가 아니라 캐릭터는 물론 세부적인 장면이나 대사까지 비슷하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저작권이 작가 사후 70년만 지켜진다 해도 이는 모티브의 수준을 넘는다는 게 일부 시청자들의 지적이다. 다른 시간과 공간이지만 줄거리의 골간이 너무 닮아 있어 '파트 2'에서는 뭔가 적절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과연 '연인-파트 2'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오하라와 버틀러가 재회해 인연을 맺게 된다. 결혼해서 딸도 낳는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아니다. 결혼 후에도 두 사람 사이엔 운명의 장난이 계속된다. 오하라는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때 그 유명한 대사를 읊조린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 '연인'의 유길채와 이장현의 운명을 어찌 될까. 두 사람에겐 밝은 희망의 태양이 뜨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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