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거리 떠올리면 '그 사람' 기억이...뇌질환 치료 단서 된다
“나는 지금 내 앞의 청중들 속 특정한 누군가를 볼 수 있고 그 사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위치에 있고,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죠. 설치류는 할 수 없고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는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이같은 능력의 근원을 찾는 일은 기억상실증 등을 치료하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에드먼드 롤스 영국 워릭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6~8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26회 한국뇌신경과학회 정기국제학술대회(KSBNS 2023)’에서 기조 강연을 통해 인간이 장소를 기억하는 특별한 능력이 어디서 생겨나는지 알아내는 일은 뇌 질환을 치료하는 바탕이 된다고 설명했다. 한국뇌신경과학회는 뇌과학 및 신경과학의 기초·응용 연구분야에서 학술 발전과 의료적 해결책 등을 제시하는 학회로,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최신 지견을 공유하고 젊은 학자들의 교류의 장을 열고 있다. 이번 학회에는 전 세계 뇌신경과학 연구자 1800여 명이 참석했다.
● 특정 장소 떠올리면 특정 감정 생겨나는 이유
롤스 교수는 컴퓨터 신경과학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다. 뇌의 신경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수학적 모델을 바탕으로 컴퓨터 이미지화 작업을 진행해 궁극적으로 뇌 장애를 치료하는 방법을 찾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롤스 교수는 뇌의 한 영역인 해마에 위치한 ‘공간 시야 세포’가 기억 및 감정과 어떤 연관을 갖는지에 대해 강연했다. 공간 시야 세포는 일종의 내비게이션 기능을 하는 세포로, 사람은 이를 통해 공간을 지각할 수 있다. 가령 지갑을 깜빡하고 외출했을 때 머릿속으로 집안 어디에 지갑이 위치해 있는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세포 덕분이다. 공간 시야 세포를 통해 시각 정보를 탐색하고 회상할 수 있다.
공간 시야 세포는 특정 물체가 어디에 있는지 더 잘 기억할 수 있도록 주변 다른 사물과의 거리감 등으로 공간적 이해를 높이는 역할도 한다. 공간 시야 세포로 만들어진 기억은 그 장소에 누가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 '사건의 기억'을 함께 저장할 수 있게 만든다. 특정한 장소를 떠올릴 때 특정한 인물이나 감정이 함께 떠오르는 이유다.
롤스 교수는 “장소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그 장소에 있던 사람이 함께 기억될 수 있다”며 “강의 중 특정한 자리에 특정한 사람이 앉았다는 것은 나의 단편적인 기억이 된다”고 말했다. 공간 시야 세포는 단편적인 사건들을 기억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과 감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기억상실증 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뇌졸중, 뇌수막염, 뇌염 등 뇌 질환이 있으면 공간 시야 세포가 손상될 수 있다. 이는 장소에 대한 기억과 관련 기억 및 감정 등을 잃어버리는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컴퓨터 신경과학을 이용하면 뇌를 열지 않고도 뇌의 구조와 기능 등을 살필 수 있다. 향후 뇌 절개 없이 진행하는 치료나 수술 등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전망이다.
● 경쟁심은 어디서 나올까...뇌의 비밀 찾는 다채로운 연구 소개
이날 또 다른 강연을 진행한 이성중 서울대 뇌과학협동과정 교수는 인간의 여러 감정 중 ’경쟁심‘이 어디에서 유발되는지 확인한 연구를 소개했다. 이 교수는 이날 신경과학 분야에서 창의적인 업적을 낸 학자에게 수여하는 장진학술상을 받고 수상자 강연을 진행했다. 이 교수는 쥐 실험을 통해 경쟁을 할 때 뇌 전전두엽의 ’성상교세포‘가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성상교세포가 잘 활성화될수록 사회적 서열이 높아진다. 인위적으로 성상교세포 활동성을 높이자, 서열이 낮았던 쥐의 서열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사회성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뇌 기능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했다.
이번 학회에서는 젊은 과학자들의 흥미를 끄는 연구들도 공개됐다. 재미있다고 느낄수록 정말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지, 냄새가 얼굴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지, 인공지능(AI) 기반으로 뇌 나이를 측정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신진 연구자들의 포스터 발표가 소개됐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뇌과학 연구팀은 “재미있다고 느낄 때 진짜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실험해봤다”며 “재미를 느낄 때 동공 크기가 확장되며 집중력이 높아진다는 점은 확인됐지만 시간은 오히려 느리게 간다고 느꼈다. 아직 분석 초기 단계여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로리아 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의 ’사회적 행동을 형성하는 신경면역 상호작용‘, 장동선 한양대 창의융합교육원 교수의 대중강연, 젊은 과학자들을 위한 워크숍 행사 등도 열렸다.
[부산=문세영 기자 moon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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