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엄마 어떻게 돌봤어요?… 사랑으론 못해, 의무로 하는 거지[소설, 한국을 말하다]
돌봄노동 - 의무와 사랑
AI(인공지능)는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꿀까. 가속하는 저출산과 고령화, 사교육 광풍, SNS가 발신하는 끝 모를 욕망 속에서 한국인은, 또 한국 사회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이 질문에 답한다. 9월 4일부터 연재에 들어간 문화일보의 ‘소설, 한국을 말하다’는 문단에서 가장 첨예하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소설가 15명이 들여다 본 ‘지금, 한국’을 짧은 소설에 담았다. 매주 월요일 한 편 씩 공개되며, 12월까지 계속될 예정.
“나는 요양원은 안 간다.” 그녀는 그 말을 여러 번 했다. 아마 환갑이 되던 해부터 그 말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건강했고, 계속 건강하게 살 자신이 있었다. 건강하게 살다가 죽을 자신이 있었다. 요양원에 안 간다고 말할 때 그녀의 말에는 그런 뜻이 숨어 있었다. 사람이 자기 운명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망각할 정도의 자신감이었다. 건강했고 집이 있었고 통장에 돈도 들어 있었다. 자신감과 자만심은 그 경계가 모호해서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노인 인구가 천만에 육박할 정도로 대한민국이 늙었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그녀는 혀를 끌끌 찼다. “젊은 애들 어쩌라고 노인들이 저렇게 오래 살아.”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기가 젊은 애들의 근심거리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70살 무렵의 일이었다. 사람은 원래 이상한 동물이어서, 언젠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언제든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 80년, 90년 된 기계의 부품이 고장 나는 것처럼 80년, 90년을 살고 있는 인간의 몸이 어떤 상태일지 막연히, 추상적으로 알지만, 구체적으로 자각하지는 않는다. 구체적 자각을 애써 피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미, 막연히 아는 것을, 굳이, 똑바로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80이 넘어서도 혼자 밥을 해 먹고 누구 도움 없이 집안일을 할 수 있었으므로, 그녀는 거리낌 없이 ‘요양원은 안 간다’는 말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자기 말을 듣고 부담을 가지리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건강했고 집이 있었고 통장에는 돈이 있었다. 대학에서 상담학을 강의하는 그녀의 딸이,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식에게 나 책임져라, 하고 요구하는 거고, 그게 아니면 그냥 고독사하겠다고 선언하는 거예요, 라고 웃으면서 말했을 때 버럭 화를 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내가 언제 네깟 년 신세 지겠다고 했냐, 인정머리 없는 년 같으니라고. 딸 하나 남은 게 저런 소리나 하고.” 그녀는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을 떠올리며 훌쩍였다. 딸은 곧 사과했고, 그녀는 고독사하지도 않고 자식 신세를 지는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다.
어느 날, 악몽을 꾸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그녀의 뇌 속에서 출혈이 일어난 사실을 그녀는 두 주 동안 알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딸이 그녀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녀는 의자와 식탁, 소쿠리, 선풍기, 종이상자들이 가득 쌓인 베란다에서 발견되었다. 커다란 개집처럼 보이는 그 안에 어머니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딸은 깜짝 놀랐다. 그가 종이상자를 들추자 몸을 잔뜩 웅크린 어머니는 머리와 손을 내저으며 없어요, 안 들어왔어요, 몰라요, 하는 말만 반복했다. 엄마, 저예요, 왜 그러세요, 하고 다그치는 딸을 그녀는 알아보지 못했다. “자네도 얼른 여기 숨어, 안 그러면 죽어. 나쁜 놈들이 잡으러 오니까 여기로 숨어야 해.” 어머니는 그녀를 개집 안으로 잡아끌었다. 딸은 어머니가 어린 시절 전쟁 중에 겪었던 일을 다시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70년도 더 된 일이 그녀의 몸 안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나타났다는 것을.
병원으로 모시고 가 뇌에 고인 피를 뽑아내는 수술을 받게 했지만, 손상된 뇌세포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녀는 치매 환자가 되었고, 더 이상 ‘요양원은 안 간다’는 말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신 그녀는 베란다에 만들어 놓은 ‘개집’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곳은 난리 중에 아버지와 형이 숨어 있던 지하실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갈 때만 눈치를 보며 나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용변도 그곳에서 해결했다.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하면 무섭게 소리를 지르고 자해를 했다. 헛소리를 하고 자주 비명을 질렀다. 집안은 더럽고 어지럽고 악취가 났다. 집안이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다. 학교 수업이 없는 날은 어머니 간병을 위해 서울과 시골을 오가는 딸의 삶도 덩달아 엉망이 되었다.
요양보호사가 방문하여 식사를 챙기고 집안일을 도와주었지만 어머니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주변에서 전문요양병원을 추천했다. 의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어렵게 들어간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보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요양원은 안 간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와 결단을 막았다. 고려장이라도 하려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마음이 아팠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된 어머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녀는 베란다의 오물을 치우거나 어머니의 늙고 야윈 몸을 씻기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며 차를 타고 서울과 시골을 오갔다. 그렇게 지쳐갔다.
그녀가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던 이복오빠에게 전화를 건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상처한 남자와 재혼했고, 그녀를 낳았다. 아버지에게는 이미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때 중학교 3학년이었던 그를 아버지는 미국 친척집으로 보내 공부하게 했다. 아버지가 전처에서 난 아들과 어머니의 감정을 고려해 취한 조치였다. 그들은 거의 같이 살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오빠라고 불러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럴 기회가 없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집안 행사가 있을 때 마주치긴 했지만 대체로 덤덤했다.
사정을 듣고 바로 달려온 이복오빠는 자기가 정년퇴임을 해서 일이 없으니 자기가 모시겠다고 했다. “그러면 너무 좋지만…….” 답답해서 하소연이나 하려고 전화했던 건데 그렇게 말해주니 너무 고마워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동안 오빠 대접은 물론 가족 취급도 안 해서 염치가 없었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면 좋지. 그런데 그래도 될까?” 오빠는, 우리가 가족 아니냐, 라고 말해서 그녀를 다시 울렸다. “그동안 혼자서 고생 많았다.” 울먹이는 그녀의 등을 오빠가 토닥였다.
어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알아볼 이유가 없었다. 그를 알아봤다면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거라고 딸은 생각했다. 왜냐하면 의지할 데 없는 사춘기 남자애를 잘 돌보지 못한 자신을 책하며 후회하는 어머니 모습을 몇 번 보았으니까. “한참 사랑이 필요했을 텐데, 내가 이제 엄마니까, 떠나간 엄마 생각이 나지 않게 사랑을 줬어야 했는데, 그때는 나도 어려서, 철이 없었어.”
어머니는 딸에게 그런 것처럼 그도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다. 어떨 때는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왔느냐고 소리치고, 어떨 때는 잘못했다고 벌벌 떨며 빌었다. 그는 그 모든 걸 다 받아들였다. 때리면 맞고 잘못했다고 빌면 당신 잘못 아니라고 보듬었다. 자신도 칠순에 접어든 노인이었지만 그는 힘들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원망도 하지 않았다.
주말에 어머니의 집을 방문했을 때 딸이 본 것은 어머니를 어린아이처럼 두드리며 자장가를 부르고 있는 이복오빠의 모습이었다. 오빠는 그녀에게 이제 막 잠들었으니 조용히 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주의를 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이복오빠의 그런 모습이 낯설고 신기했다. 사랑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을 그는 하고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사랑이라는 걸 받아보지 못한 그가 그렇게 사랑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고마워하며 그런 뜻을 비쳤을 때 그는 웃기만 했다. 힘들지요? 하고 묻자 힘들지, 그렇지만 할 만하다, 라고 대답했다.
방학이 되자 그녀는 방학 동안이라도 자기가 돌보겠다며 짐을 싸 들고 시골로 내려왔다. 오빠에게 휴가를 주기로 한 것이다. 요양보호사가 있다고 해도 치매 노인을 돌보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쩐 일인지 어머니는 점점 난폭해졌다. 자기 몸도 건사하지 못하는 노인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걸핏하면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욕을 했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쌍욕이어서 그녀는 들을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어머니 집으로 들어온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한 움큼 빠져나온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며 그녀는 더는 이렇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몹시 심란한 기분으로 이복오빠에게 연락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오빠는 어머니가 요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랬지요. 그랬어요. 그렇지만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난 못하겠어요. 사랑이 모자란 걸까요.”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미워서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가 말했다. “사랑으로 하는 게 아니야. 의무로 하는 거지. 사랑으로는 못해. 네가 힘든 건 사랑으로 하려고 해서야.” 그러면서 그는 요양병원을 알아보자고 말했다. 사랑이 할 수 없는 일을 사랑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사랑이 아니라 의무로 돌보는 거라고. 그래야 지속적으로 제대로 할 수 있다고.
■ 작가의 말
‘의무와 사랑’은 고령화 시대 돌봄 문제와 노년의 삶을 사유하게 한다. 소설 속 딸은 치매 걸린 엄마가 힘겨워 ‘사랑이 모자란 것’이라 자책하고, 가족에 상처가 있는 이복오빠는 오히려 안정적으로 엄마를 돌본다. 그러나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위대함’을 믿는다는 이승우 작가는 믿을 수 없는 건 ‘사람의 감정’이라고 했다. 즉, 소설은 “감정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랑’으로는 지속성이 관건인 돌봄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복오빠를 추동한 건 ‘의무’고, 이는 돌봄에 대한 시선 전환과 사회 제도적 차원의 접근을 강조한다. “시대 풍조도 바뀌었고, 자녀들이 많던 과거와는 달라서, 가족의 ‘사랑’이나 ‘효’에 이 문제를 맡겨둘 순 없지요. 저 역시 노년에 접어들어 남 일 같지 않습니다.”
■ 이승우는…
1959년생. 1981년 등단 후 ‘생의 이면’ ‘지상의 노래’ 등을 썼다.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수상.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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