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노동조합에서 ‘이음과 나눔’의 새꿈을 [6411의 목소리]

한겨레 2023. 9. 1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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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을 대상으로 퇴직 이후의 삶을 주제로 한 강사양성교육 모습. 필자 제공

윤제훈

이음나눔유니온 조직위원장

나는 서울교통공사에서 2020년 12월31일 퇴직했다. 역무직으로 35년 7개월을 근무했다. 지하철을 탈 때 업무상 지녔던 게이트 프리패스 카드 대신 일반 교통카드를 사용하고, 더는 오지 않는 월급 입금 알림 문자를 떠올리면 퇴직했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이건 오래된 습관에서 비롯된 사소한 착각일 뿐이다.

퇴직 이듬해 패혈증으로 3개월 동안 입원치료를 받고 수천만원 병원비를 결제하면서, 회사든 노조든 울타리가 되는 조직 밖의 개인이 되었음을 실감하고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회사 다닐 땐 단체 실손보험으로 병원비가 커버됐지만, 퇴직 뒤 개인 실손보험은 지병 등을 이유로 재계약이 되지 않았다. (오해 마시라. ‘신의 직장’에 ‘귀족 노조’까지 있다는 곳에서 일하다 퇴직해놓고 병원비로 힘들었다는 하소연을 하려는 게 아니다.)

서울교통공사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에 열과 성을 다했다. 1987년 서울지하철공사 노조가 창립됐을 때 대의원으로 활동했고 퇴직하는 날까지도 대의원이었다. 오랫동안 고생한 해고노동자 동지들에 비할 바 아니지만, 역무지부장 시절엔 징계를 받기도 했다. 사랑하는 동료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생긴 내 인생의 훈장이지만, 더는 자랑거리도 아니다.

나처럼 수십년 동안 일하고도 노조라는 울타리 속에 한번도 들어갈 수 없었던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노동환경을 지키는 데 외려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는 청년 프리랜서 노동자들 앞에서 나는 정규직이라는 우물(울타리) 안 개구리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나 불안정고용 노동자들은 내가 누렸던 유급 병가며 단체 실손보험 가입 등 기업복지는 고사하고 아프면 해고되는 게 다반사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임금·노동시간의 격차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 노동조합 조직률은 △300명 이상 사업장 46.3% △100~299명 사업장 10.4% △30~99명 사업장 1.6% △30명 미만 사업장 0.2%다.(2021년, 고용노동부) 나와 동료들만 인간답게 살려고 노조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기업별 노조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지만, 힘 있는 노조가 선제로 좋은 영향력을 발휘해야 했다. ‘귀족 노조’라는 비판을 더 호되게 받아도 마땅하다.

해마다 11월이면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노동자대회’에서 소리 높여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전태일처럼 자신보다 어려운 노동자와 풀빵을 나누지 못했다. 노회찬 전 의원의 ‘6411 연설’에 눈물을 흘렸으나 지하철 청소노동자와 장미꽃으로도 연대하지 못했다. 대다수 조합원의 요구를 반영하는 임단협 투쟁이고, 기업별 노조라는 이유를 댈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움을 덜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제는 눈치 안 보고 말한다. “야, 우리가 받기만 했지 한 게 뭐 있나? 어렵게 노동조합 하는 곳에 후원 좀 하자!”라고.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을 대상으로 퇴직 이후의 삶을 주제로 한 강사양성교육 모습. 필자 제공

최근 ‘이음나눔유니온’이라는 퇴직자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다. 내 세대의 요구도 분명히 있다. 만 60살 정년퇴직 뒤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지만, 연금 수령 시기까지 공백이 생기는 문제는 사회적으로 심각하다. 노인이 된 베이비붐 세대가 좀 많은가. 게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가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43.2%)이 가장 높다고 한다. 10명 중 4명은 중위소득 50% 이하 소득으로 살아간다는 얘기다.

퇴직자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만 퇴직자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 노동조합 이름처럼 ‘잇고 나누는’ 활동을 하고 싶다. 같은 직장을 다닌 노동자들도 퇴직 이후의 경제적 상황은 다르고, 생활수준 격차도 크다. 노후 준비를 잘해서 걱정 없이 사는 소수의 사람도 있지만, 가족을 부양하느라 질 낮은 일자리라도 찾아다니며 허덕이거나 일단은 무조건 쉬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사정이 제각각이다 보니 퇴직노동자들도 쉽게 모이지 않는다.

가난은 사람의 삶을 단절로 몰고 가지만,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단절 대신 이음을 선택할 수 있다. 또 이음은 나눔으로 연결된다. 인생 2막에서는 세대, 성별 등등의 차이를 잇고 나눔과 연대의 새로운 노동조합 활동으로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꿈을 다시 꾸고 싶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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