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이념을 그렇게 중시했었나” 우려 커지는 여권
국민의힘 의원들 “자칫 총선 패배에 레임덕 올 수도”
“지역에 가면 ‘왜 쓸데없는 짓을 하냐’며 질타 많이 들어”
(시사저널=이원석 기자)
"국가의 어떤 정치적 지향점과 국가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또 어떠냐,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게 바로 이념이다.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철 지난 엉터리 사기 이념에 매몰되고, 거기에 대해 '우리 당은 이념보다는 실용이다'? 기본적으로 분명한 이런 철학과 방향성 없이 실용이 없다. 어느 방향으로 우리가 갈 것인지를 명확하게 방향 설정을 하고 우리 좌표가 어딘지 분명히 인식을 해야 우리가 제대로 갈 수 있다." 8월28일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다.
3개월 전엔 "탈이념" 말했던 尹 대통령
이날 연찬회에 참석했던 한 국민의힘 의원은 이후 사석에서 기자에게 "사실 좀 놀랐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렇게 이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는 몰랐다. 게다가 지금 시점에서 이념을 강조하는 게 내년 총선에서 긍정적일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당 국회의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거침없이 쏟아낸 윤 대통령의 발언 중 이념과 관련한 이 대목은 충분히 이목을 끌 만했다. 특히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를 두고 한참 시끄러운 시점에 나온 발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공산당 가입 이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 안에 위치하는 것이 부적절해 이전하겠다는 군의 이념 논쟁에 윤 대통령이 힘을 실어준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야권에선 윤 대통령이 그러한 시도의 중심에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가 홍범도 장군 흉상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여러 사례가 쌓이고 쌓였다. 최근 들어 윤석열 정부 장관들을 중심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 재평가,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의 친일 행적 삭제 등의 시도가 포착됐다. 윤 대통령은 8월15일 제78주년 광복절 기념식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며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의 현실에서 이러한 반국가 세력들의 준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근래 정치권에서 사라졌던 '공산전체주의' '반국가 세력' 등의 단어가 지금 윤 대통령 입에선 흔해졌다. 같은 흐름이 반복되고 지속되면서 정치권에선 윤석열 정부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를 시작으로 '이념 전쟁'을 시작했다는 확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주목할 지점은 이념과 관련해 윤 대통령의 생각은 불과 3개월여 전과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은 5월23일 국무회의에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겨냥하며 "이념이나 정치 논리가 시장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탈이념과 탈정치, 그리고 과학 기반화가 바로 정상화"라고 강조했다. 불과 3개월 전과 지금의 기조가 180도 달라진 듯 보이는 이유는 뭘까. 윤 대통령과 정부가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념 전쟁에 나선 속내는 뭘까.
우선은 총선을 의식해 전략적으로 이념을 꺼내 들었다는 해석이다. 윤 대통령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던 인사 등 다수 여권 관계자에 의하면 윤 대통령은 내년 총선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다. 시사저널은 지난해 윤 대통령이 주변에 "총선은 어차피 내가 치르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최근 여권 관계자들이 모인 사석에서 내년 총선의 목표로 구체적인 숫자인 170석을 제시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런 윤 대통령이 총선을 200여 일 앞두고 아무런 이유 없이 이념 드라이브를 걸진 않았을 거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이동관, 윤 대통령과 자주 의견 나눠"
중요한 건 총선을 앞두고 벌이는 이념 전쟁이 과연 여권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느냐다.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은 지지층 결집이다. 지금 시점에 지지층 결집이 왜 필요하다고 봤을까. 지난 대선 때 윤석열 캠프를 비롯해 여러 선거 캠프에 몸담았으며 선거 전략에 능한 보수진영 인사의 풀이다. "보수는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기반 자체가 흔들렸고 뿔뿔이 흩어졌다. 생각해 보라. 지금 보수의 핵심 지지층이 누구인가. 답을 내기가 굉장히 어렵다. 윤 대통령은 대선을 치르면서 자신을 향한 지지층이 순식간에 흔들리는 걸 보면서 그 사실을 몸소 체감했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특히 그 원인 중엔 보수진영 내 분란도 컸다. 따라서 윤 대통령은 가장 먼저 흔들리지 않는 지지층을 확실하게 결집해야 내년 총선이든 지방선거든 승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념이라는 끈으로 지지층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확실하게 묶는 거다."
반면 전략적 수법이 아니란 시각도 있다. 윤 대통령 자신이 오랫동안 지녀왔던 소신이라는 것. 실제 윤 대통령은 정계에 입문한 후부터 '자유'라는 키워드로 자신의 이념 내지 신념을 설명해 왔다. 대선 과정에선 자신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꼽으면서 아버지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로부터 선물받아 검찰 시절까지 "매일 갖고 다녔다"고 강조했다. '자유'는 대통령 입에서 나오는 말 중 가장 빈도가 높은 단어가 됐다. 대통령 취임사에서부터 35번 사용했고, 지난 4월 미국 상·하원 합동 의회 연설에서는 무려 46번, 본격적으로 이념전에 불을 붙인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27회나 반복했다. 실제 자유가 중심이 된 윤 대통령의 이념이 한·미·일 외교 등 외치는 물론 내치에서도 더 선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정치권에선 이념 전쟁과 같은 윤석열 정부의 최근 기조들은 윤 대통령 자신의 소신보다는 그 주변인들의 소신이 더 반영된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나온다. 윤 대통령이 불과 3개월 전엔 다른 말을 했다는 점도 그가 어딘가에서 영향을 받으며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그런 생각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울러 반공주의 등 그 양상이 과거 특정 보수 정권 내에서 발현됐던 그것과 크게 닮았다는 해석이 나온다. 바로 이명박(MB) 정부에서 중심이 됐던 '뉴라이트' 사상이다.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윤 대통령이 뒤늦게 '뉴라이트' 의식의 세례를 받은 것 같다"며 "원래 제가 듣기로는 안 그랬던 사람이 늦깎이 의식화가 된 것 같다"고 견해를 밝혔다.
주변인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 주변엔 친이(親이명박)계가 대거 포진해 있다. 윤 대통령의 대선 캠프 초창기부터 정치인은 물론 실무자들까지도 MB 정권에서 일했던 인사 중심으로 구성돼 있었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특히 캠프의 1기 멤버인 권성동·장제원·윤한홍 의원과 박민식·신지호 전 의원은 모두 친이계로 분류된다. 권·장·윤 의원은 윤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으로 당내에 이른바 '윤핵관'(윤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 그룹을 형성하고 그 그룹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부(部)로 승격된 국가보훈부의 초대 수장이 된 박민식 장관은 최근 이념 전쟁의 선봉에 서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 대통령실 참모들과 내각에도 MB 정부 요직에서 일했던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김대기 비서실장(MB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 김은혜 홍보수석(청와대 대변인),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인수위 부대변인),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기획관), 한오섭 국정상황실장(청와대 정무1비서관실 선임행정관), 한덕수 국무총리(주미대사),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등이다.
최근에도 윤 대통령은 MB 정부에서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지낸 김영호 통일부 장관, 대변인과 홍보수석을 역임한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던 유인촌 대통령문화체육특보를 임명했다. 특히 김 장관은 과거 뉴라이트 학자들의 싱크탱크인 '뉴라이트 싱크넷'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2005년 출범한 뉴라이트 역사 단체 '교과서포럼'에서도 활동했다.
자녀 학교폭력 의혹, 언론 장악 논란 등으로 야권의 반발이 컸음에도 결국 임명된 이동관 방통위원장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시절에 칼럼을 통해 '뉴라이트'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위원장은 방통위원장 임명 전까지 대통령 대외협력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대통령실 사정을 잘 아는 한 여권 관계자는 "대외협력특보 때 이 위원장은 윤 대통령이 매우 자주 의견을 나누던 인사 중 한 명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참모 중에서도 이 위원장은 주장이 매우 강한 편인데, 윤 대통령도 이 위원장 견해를 경청했던 것으로 안다"고 전하기도 했다.
"참모들이 문제… 대통령에게 쓴소리 못 해"
눈여겨볼 점은 대통령실과 내각의 분위기와 달리 여당 내에서는 우려의 시각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이미 윤상현·안철수·하태경 의원 등 3선 이상 중진급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정부의 이념 드라이브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고 나섰다. 총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중진급 의원도 "이대로면 총선에서 져도 할 말이 없다. 정부가 민심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 지역에 가면 '왜 쓸데없는 짓을 하냐'며 질타를 많이 듣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참모들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윤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전혀 하지 않고, 자기 영달만 꾀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당직을 맡고 있는 익명의 당 관계자도 "이념 전쟁 논란이 불거지고 나서 최근 윤 대통령과 당 지지율 여론조사를 보면 수도권과 충청권 등에서의 하락이 나타난다. 중도층은 이념 전쟁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의미"라며 "홍범도 흉상 이전 문제나 이념 논쟁이 자칫하면 총선 패배에 이어 윤 대통령 레임덕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에 매우 걱정된다. 선거 승리를 위해 어떤 게 필요한지 냉철하게 따져봐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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