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뿌린 씨앗의 결실”…K-방산·우주 국가 대표로 [진격의 한화]
[커버스토리]
한화는 2000년대 들어 시대 조류를 가장 잘 탄 기업 중 하나다. 기술과 산업의 변곡점에서 변화를 놓치지 않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기회를 찾아냈다. 1952년 화약 제조업체로 시작한 한화가 70여 년간 고속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이다. 2015년 삼성의 석유화학·방산 4개사를 인수한 빅딜은 방산과 항공 우주 사업 역량 강화의 밑거름이 됐다.
최근 한화의 M&A 행보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마치 김승연 회장이 29세에 회장을 맡은 직후와 비슷하다. 1981년 회장에 취임한 그는 이후 5년간 전광석화처럼 회사를 키웠다. 한양화학·한국다우케미칼·정아그룹·한양유통 등이 1986년까지 인수한 회사들이다.
최근 3년간 M&A도 그때 못지않다.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기 위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업들을 인수하거나 대규모 시설 투자에 나서고 있다. 한화는 화약 사업을 밑거름 삼아 방산·태양광·우주항공 등 오직 한화만이 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찾아 끊임없이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왔다. M&A를 통해 주력 사업의 핵심 역량을 강화하고 국가 대표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반을 확보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로 주력 사업인 방산이 수주 잭팟을 터뜨렸고 3세 경영인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미래를 내다보고 10여년간 이끌어 온 태양광 사업도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글로벌 환경 규제와 에너지 안보 중요성이 커지면서 성장 궤도에 오르고 있다. 오랜 축적의 시간을 거친 한화에 게임 체인저가 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대 이은 M&A 승부수…한화오션 품었다
김 부회장이 대를 이어 추진한 그룹 사업 구조 재편도 완성 단계를 향해 가고 있다. 특히 김 부회장이 승진 1년 만에 부친이 이뤄 내지 못했던 한화오션(구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성공하면서 그룹 내 영향력이 확대됐다.
한화는 한화오션 인수로 기존의 우주·지상 방산에서 해양까지 아우르는 ‘육·해·공 통합 시스템’을 갖춰 글로벌 방산 기업으로의 성장 토대를 갖춰 가고 있다. 김 부회장이 주도한 방산·신재생에너지 사업에서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며 그룹 내 입지도 더 탄탄해졌다는 평가다.
그는 한화오션 인수 직후 기자 간담회에서 “한화오션이 합류하며 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화시스템과 함께 많은 분야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다”며 “대한민국 대표 방산 기업답게 정도 경영을 펼치며 세계 시장에서 더 확고한 경쟁력을 갖춰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 부회장은 한화오션의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한화오션은 글로벌 초격차 방산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최근 2조원 규모의 유상 증자를 발표했다. 확보한 자금으로 해외 해양 방산 시장 진출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고 친환경 연료 기반의 추진 체계와 친환경 운반선, 자율 운항 선박 기술을 고도화할 방침이다.
구체적으로 초격차 방산 솔루션 9000억원, 친환경·디지털 선박 6000억원, 스마트야드 3000억원, 해상 풍력 토털 솔루션 2000억원 등 대규모 투자로 조선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신사업의 기틀을 강화한다는 구상이다.
이를 바탕으로 2040년까지 매출 30조원, 영업이익 5조원의 ‘글로벌 오션 솔루션 프로바이더’로 도약할 계획이다. 한화는 현재 진행 중인 HSD엔진 인수가 마무리되면 자체적으로 선박 건조부터 엔진 제작까지 수직 계열화를 구축해 ‘토털 선박 제조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방산 통합’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시너지 본격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중심으로 한 방산 부문의 대대적인 사업 구조 재편도 완료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한화디펜스에 이어 (주)한화 방산 부문까지 합병하며 항공·우주·방산을 아우르는 통합사를 구축했다. 자회사는 물론 그룹 내 계열사와의 사업 협력으로 시너지를 높여 2030년까지 ‘글로벌 10위 종합 방산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전략이다.
김 부회장은 지난 4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뉴 비전 타운홀 행사에서 ‘새로운 기술로 미래를 개척하고 지속 가능한 내일의 가치를 만드는 초일류 혁신 기업이 되자’는 비전을 제시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최근 K-방산 열풍에 힘입어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올 1분기에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방산 수출액은 처음으로 내수 매출액 규모를 넘어섰다.
방산 부문에서만 매출액 8415억원, 영업이익 1770억원을 거뒀다. 2022년 폴란드와 약 8조원 규모의 K9 자주포와 천무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아랍에미리트(UAE)·이집트와 수출 계약이 체결되면서 2022년 수주 잔액은 19조8000억원 규모로 2021년 말 대비 약 4배 가까이 확대됐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올해 2분기 매출 1조7981억원, 영업익 831억원을 올렸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23% 증가한 반면 영업이익은 5% 줄었다. 하지만 올해 4분기부터 K9 자주포와 천무의 추가 인도가 시작돼 2025년까지 실적 성장세가 기대되고 있다.
수출 확대가 가시화되자 지난 6월 폴란드에 유럽 법인도 설립했다. 폴란드와 2차 계약이 체결되면 중·장기 실적이 가파르게 상승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김 부회장의 진두지휘로 수주 낭보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엔 독일·미국·영국의 방위 산업체들과 경쟁해 5년 만에 호주 정부의 2조원 규모 보병전투차량(IFV) 도입 사업 우선 협상 대상자에 최종 선정됐다. 호주 레드백은 연내 계약될 예정이다. 폴란드·루마니아 등에서도 레드백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루마니아발 자주포도 루마니아 국방 예산 승인 등을 거쳐 연내 계약이 이뤄질 수 있다. 김 부회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방산 기업으로서 우방국의 국가 안보 강화를 통한 세계 평화와 국제 정세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개발로 K-방산의 해외 진출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그룹의 방산 3사를 이끌고 직접 폴란드를 찾아 방산 세일즈에도 나섰다. 지난 9월 5일(현지 시간) 폴란드에서 열린 국제방위산업전시회(MSPO)에서 한화 전시장을 찾은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을 만나 육·해·공을 아우르는 한화의 첨단 기술력과 폴란드 맞춤형 솔루션 등을 설명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지정학적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산 무기를 대거 도입하며 ‘K-방산’의 큰손으로 급부상했다. 2022년 한국과 약 17조원에 달하는 방산 계약을 체결했고 2024년도 국방비를 자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4% 이상인 1370억 즈워티(약 43조5800억원)로 늘릴 계획이다.
2022년 K9 자주포 등 무기 체계에 이어 3000톤급 잠수함 3~4척을 도입하는 3조원 규모의 오르카 프로젝트 발주도 앞두고 있어 한화의 핵심 수주처로 꼽히고 있다.
육·해·공 넘어 우주로 진격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오직 한화만 할 수 있고 한화가 해야만 하는 지속 가능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현재와 미래를 이끌어 나가자”고 주문했다. 한화는 우주 항공 사업을 방산·에너지를 이을 차세대 성장 사업으로 키우고 있다.
국가 주도의 ‘올드 스페이스(old space)’ 시대가 끝나고 민간 기업들이 우주 개발을 주도하는 ‘뉴 스페이스(new space)’ 시대가 될 것을 내다본 것이다. 우주 사업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김 부회장이 이끄는 그룹 내 우주 사업 전담 조직 ‘스페이스 허브’를 2021년 3월 출범시켰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중심으로 구성된 스페이스 허브는 발사체·위성 등 제작 분야와 통신 등 서비스 분야로 나눠 연구·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한화는 한국형 발사체(누리호) 고도화 사업 발사체 총괄 주관 제작 사업을 수주하며 우주 항공 사업 역량을 인정받았다. 경쟁력을 더 높이기 위해 무인·자동화 기술을 접목한 무기 체계 확대를 추진하며 자회사인 한화시스템·쎄트렉아이 등과 협력해 발사체부터 위성 서비스에 이르는 우주 사업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위성 제작→발사 수송→위성 서비스로 이어지는 밸류 체인을 구축하고 향후 우주 탐사 기술까지 확보해 한국 최초의 ‘우주 산업 토털 솔루션 프로바이더’로 성장하겠다는 전략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방산뿐만 아니라 로켓, 위성통신, 달 탐사, 자원 추출 사업 등 우주 항공 분야로 영토 확장에 적극 나서고 있다. 최근 블룸버그는 “무기 수출로 큰돈을 번 한화가 세계적 우주 탐사 기업 ‘스페이스X’의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돋보기]
‘합치고 쪼개고’ 재편 속도전…3세 승계 밑그림 그렸다
한화그룹은 3세 승계 이슈와 맞물려 최근 2년간 지배구조·사업구조 재편 작업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여러 차례 쪼개고 합치기를 반복하며 복잡했던 사업 구조를 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화솔루션 주도 아래 방산과 신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재편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2022년 한화디펜스를 흡수·합병한 데 이어 지난 4월 (주)한화의 방산 부문을 합병해 3사 통합사를 구축했다. 흩어져 있던 그룹 방산 부문이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아래 한데 모인 구조다. 한화솔루션은 백화점 사업부인 한화갤러리아를 다시 인적 분할했다. 이에 따라 한화갤러리아는 2021년 4월 한화솔루션에 흡수·합병된 지 2년 만에 분할돼 독립했다.
대대적인 사업 재편을 통해 3세 승계 구도 윤곽은 더 뚜렷해졌다. 기업의 성장성을 극대화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승계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시장의 시각이다.
장남인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방산·항공우주·태양광 등 주력 사업과 그룹 경영을 총괄하고 2남인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이 금융 부문을, 3남인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전략본부장이 유통·레저 부문을 각각 나눠 담당하는 독자 경영 체제로 갈 것이란 관측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김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승계 작업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3형제 중 승진 속도도 가장 빨라 2022년 8월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김 부회장은 한화솔루션 대표와 그룹 지주회사 격인 (주)한화의 핵심 계열사 2곳의 대표도 맡으며 후계자의 입지를 굳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앞으로 (주)한화 지분 확대를 통한 실질적 지배력 확보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금융 부문을 이끄는 김동원 사장은 지난 2월 입사 9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주)한화는 2022년 한화생명의 최대 주주인 한화건설을 흡수·합병하면서 지주사 전환 리스크를 피하면서 지배 구조를 단순화했다. 김 본부장은 한화갤러리아 법인 독립 이후 주식을 지속적으로 매수해 지분을 확대하며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김 본부장이 보유한 한화갤러리아 지분은 0.32%로 늘었다.
남은 과제는 그룹 지배 구조 최정점에 있는 (주)한화 지분 확보를 통해 지배력을 높이는 일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주)한화 지분 22.65%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김 부회장은 4.91%, 김 사장과 김 본부장은 각각 2.14%씩 보유하고 있다.
재계에선 김 부회장이 (주)한화 지분을 확대하는 방안으로 김 부회장(50%)을 포함해 3형제가 지분 100%를 보유한 한화에너지와 (주)한화의 합병, 지분 직접 매입, 한화에너지의 (주)한화 지분 확보 등의 방안이 거론된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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