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나의 해방일지’ [강준만 칼럼]
[강준만 칼럼]
“걔가 경기도를 보고 뭐랬는 줄 아냐?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내가 산포시 산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도 산포시가 어디 붙었는지를 몰라. 내가 1호선을 타는지, 4호선을 타는지. 어차피 자기는 경기도 안 살 건데 뭐 하러 관심 갖냐고 해. 하고많은 동네 중에 왜 계란 흰자에 태어나 갖고.”
지난해 봄에 방영된 인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대사다. 나는 이 드라마의 열혈 팬이었지만, 다른 팬들과는 관심사가 좀 달랐다. 작게는 서울에 직장을 둔 일부 경기도민들의 출퇴근 고통과 비애, 크게는 ‘서울공화국’ 체제가 강요하는 삶의 고단함을 다룬 드라마라는 게 나의 관전 포인트였다. 메마른 나의 감성에 다른 팬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 마지않는다.
“난 어차피 경기도민이니까 어딜 나가도 서울 나들이다. 그러니까 약속 장소 편하게 정해라. 내가 그러긴 했어. 그래도 적어도 경기도 남부냐 북부냐 동부냐 서부냐 이건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니?”
이 대사는 마치 내 이야기 같았다. 나와 서울에서 사적으로 만나는 서울시민 중 일부는 지방차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서울시민처럼 동등하게 대해주는 게 불만이었다. 약속 장소를 정할 때 지방 거주자의 교통편의를 배려해주면 안 되는가?
이건 직접 겪어보지 않고선 나올 수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좀 찾아보았더니, 작가(박해영)가 49년간 경기도에 산 경기도민이란다. 꼭 이 드라마의 영향 때문은 아니겠지만, 최근 들어 수도권의 출퇴근 문제를 다룬 기사들이 꽤 나오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중앙일보가 8월 하순 일주일에 걸쳐 게재한 ‘출퇴근지옥’ 시리즈다.
수도권 시민들은 ‘출퇴근지옥’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여론조사는 드물다. 이럴 땐 댓글이라도 보는 수밖에 없다. ‘출퇴근지옥’ 기사들에 달린 댓글은 꽤 재미있고 유익했다. 첫 기사에 인용된 “밝을 때 퇴근했는데, 밤이야. 저녁이 없어”라는 ‘나의 해방일지’ 대사에 “당신들이 밝을 때 퇴근하는 삶을 사니깐 결국 그 모양 그 꼴인 거야”라고 저격한 댓글을 읽고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댓글은 모두 다섯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첫번째 유형은 ‘누칼협’(누가 서울로 취업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이다. “그렇다고 한적한 지방으로 발령 나면 갈 건가? 결국 본인들이 선택한 삶을 살고 있을 뿐!” “나는 출퇴근 없는 백수인데 지옥철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 “이런 게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네.”
두번째 유형은 “잘사는 나라 중에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을까?”라고 묻는 ‘선진국 불가피론’이다. “출근 두시간은 대도시 일본 도쿄도 미국 뉴욕도 마찬가지다.” “뉴욕에 비하면 서울은 진짜 양반임.” 그럴듯해 보이지만, 문제가 있다. 뉴욕은 미국이 아니고 도쿄는 일본이 아니지만, 서울은 곧 한국이라는 점을 간과했다는 한계가 있다.
세번째 유형은 ‘긍정 마인드’다. “인생살이가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수 있다는 게 좋지 않습니까.” “생활권이 서울이라는 데 만족하세요. 모든 편의시설과 좋은 환경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사람대접받는 곳이잖아요.”
네번째 유형은 ‘지방천국론’이다. “지방 사니까 너무 좋아. 차 막히는 게 뭐지? 왜 차가 막혀? 사고 났어?” “지옥철 지옥길인데 왜 거기서 살려고 발버둥 치냐. 내려와서 살면 좀 나을 텐데.” “출퇴근 왕복 3시간이라는 말이네…. 미쳤군. 지방 사는 사람들에겐 이해 불가네.”
다섯번째 유형은 국가균형발전론이다. 내가 읽은 수많은 댓글 중 ‘베스트’는 다음과 같다. “이것이 정부의 적극적인 저출산 정책이다. 서울로 집중화해서 애 못 낳도록. 그래 놓고선 결혼 안 한다고 난리지.” 서울대 교수 조영태는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세계 최저인 0.78, 그중에서도 서울이 0.59를 기록한 것을 두고 ‘서울멸종론’을 제기했다. 올해 2분기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01, 서울은 0.53으로 ‘서울멸종’에 한걸음 더 다가섰다.
우리는 ‘출퇴근지옥’에 정부와 정치인의 책임을 묻지만, 그들은 단지 수요에 반응할 뿐이다. 댓글 가운데 앞 세 유형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건 정부와 정치인을 움직일 수 있는 수요가 매우 약하다는 걸 시사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멸종하더라도 그 이유를 알고나 당하자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지만, 헛소리하지 말라는 욕이나 먹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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