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곡점마다 빅딜로 폭풍 성장…‘육·해·공 방산 완전체’ 완성 [진격의 한화]

2023. 9. 11.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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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한화오션 거제사업장. 사진=한화오션



한화그룹의 역사는 인수·합병(M&A)의 역사다. 1·2차 석유 파동, 외환 위기 사태, 글로벌 금융 위기 등 중요 고비마다 동물적 감각과 과감한 결단으로 M&A를 통해 새로운 성장판을 열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창조적 M&A’는 대를 이어 장남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화는 37위인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인수를 통해 자산 규모가 100조원에 육박하게 돼 재계 6위로 올라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고비 때마다 M&A로 위기 돌파

1981년 29세의 나이에 그룹 총수에 오른 김승연 회장은 자신의 경영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공격적인 M&A에 나섰다. 취임 이듬해인 1982년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현 한화솔루션 케미칼·첨단소재 부문)을 인수해 석유화학을 수출 효자 산업으로 키웠다.

당시 두 회사가 적자를 내고 있어 그룹 경영진은 부실 위험이 크다며 강하게 인수를 만류했지만 김 회장은 “어려울 때일수록 알짜 기업을 싸게 사들일 수 있다”는 지론과 특유의 선구안으로 위기에 빠진 기업을 인수해 흑자 기업으로 바꿔 놓았다. 이를 계기로 한화는 10대 그룹 반열에 올라서게 됐다.

화약·기계·석유화학 등 중후장대형 사업 중심이던 한화는 레저·유통 분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기 위해 1985년 정아그룹(현 한화호텔앤드리조트), 1986년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을 인수했다.

외환 위기의 고비를 넘긴 한화는 2002년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인수했고 글로벌 금융 위기가 지나간 2012년 독일 큐셀(현 한화솔루션 큐셀부문)도 사들이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할 채비를 마쳤다. 2014년에는 삼성그룹의 구조 개편 과정에서 매물로 나온 삼성 방산·화학 4개사를 잇달아 인수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진=한화 제공



김 회장은 적극적인 M&A를 강조하며 ‘철새론’과 ‘프로펠러론’을 펼친 바 있다. “글로벌 시대에는 둥지만 지키는 텃새보다 먹이를 찾아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의 생존 본능을 배워야 한다”, “잘 만든 배도 프로펠러가 부실하면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없다. 한화가 피인수 기업의 강력한 프로펠러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

김동관 부회장은 부친의 인수·합병 DNA를 그대로 물려 받았다. 삼성과의 빅딜 과정에서도 한화솔라원 기획실장이던 김 부회장이 인수 작업을 주도하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과의 빅딜이 성사된 해 김 부회장은 상무로 승진했다.

그룹의 캐시카우가 될 기업 인수에 성공한 공로에 따른 것이란 후문이다. 한화솔라원·한화큐셀 등 태양광·신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커리어를 쌓아 온 김 부회장은 삼성과의 빅딜 이후 방산과 첨단 소재, 석유화학 분야로 경영 보폭을 넓히게 된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6월 7일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 방문해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한화오션 제공



 

 캐시카우 된 김동관의 ‘삼성 빅딜’

한화그룹은 삼성의 방산·석유화학 계열사 인수를 계기로 방위 사업 자체의 규모 확대뿐만 아니라 기존의 탄약, 정밀 유도 무기 중심에서 K9 자주포, 항공기·함정용 엔진·레이더 등의 방산 전자 사업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차세대 방위 사업에 적합한 포트폴리오를 확충하면서 방산과 석유화학 분야에서 경쟁사들을 제치고 단숨에 1위 업체로 올라서게 됐다.

김 부회장이 주도한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인수는 한화그룹의 진격의 M&A 역사에 화룡점정으로 불릴 만하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는 2030년까지 글로벌 방산 톱10에 들며 ‘한국판 록히드마틴’으로 성장하겠다는 한화의 승부수다.

대우조선해양은 김 회장의 화려한 M&A 역사에서 드물게 실패한 아픈 손가락이었다. 2008년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우선 협상 대상자에 선정됐지만 인수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이유로 인수를 포기한 바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였다. 15년이 지난 후 결국 같은 회사를 인수하는 데 성공한 특이한 사례다. 그만큼 총수 일가의 인수 의지가 강력했다는 의미다. 

서울 중구 한화그룹 사옥. 사진=한화 제공



김 부회장은 한화오션 정상화에 집중하며 방산 계열사들과의 시너지 극대화에 힘쓰고 있다. 김 회장이 M&A의 후유증을 없애기 위해 인수 후 통합(PMI) 작업과 조직 안정화에 힘을 쏟았던 것처럼 김 부회장도 거제사업장을 찾아 직원들을 격려하고 직접 해외 방산 세일즈에 나서며 힘을 실어 주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노조에 고용 보장, 협약 승계 등을 약속해 노조의 강경한 태도를 바꾸는 데도 성공했다. M&A 성패가 달린 PMI 과정에서도 특유의 신용과 의리 조직 문화로 피인수 기업 직원들의 마음을 얻어 화학적 결합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돋보기]

1955년 한국화약주식회사의 인천공장 전경. 사진=한화 제공



 

 K-방산 싹 틔운 한화의 다이너마이트 국산화

한화는 ‘불꽃’에서 시작됐다. 선대 회장인 고(故) 김종희 창업자는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산업용 화약의 중요성을 깨닫고 부산에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세웠다. 한화그룹의 모태다.

산업용 화약은 광공업·도로·부두·철도 건설 등 토목 공사에 쓰여 국가의 기간 산업을 다지는 데 필수적이었다. 기술 국산화에 성공한다면 화약 수입에 지출하는 외화를 아낄 수도 있었다.

선대 회장은 한국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해 ‘한국의 노벨’, ‘다이너마이트 김’으로 불렸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둘째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는 국가가 됐다. 정부는 그동안 수입하던 일본산 화약 수입을 중단하고 한국화약 제품으로 완전히 대체했다. 선대 회장이 사업을 시작하거나 투자를 결정하는 기준은 사업보국의 이념에 철저히 부합하는지 여부였다.

전쟁을 겪으며 한화를 설립한 선대 회장은 국가 존립을 위해선 국방 자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한화가 화약과 기계 산업에 이어 방위 산업에 진출하게 된 역사적 사건이 있다. 1968년 1월 발생한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 당시 장비의 취약성을 느낀 정부가 한화에 수류탄 개발을 의뢰했고 한화가 군용 화약 개발에 착수한 것이 K-방산의 시발점이다.

사람들은 ‘한국화약’을 줄여 ‘한화’로 불렀다. 그룹명을 한화그룹으로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수출을 위해 다른 나라 기업들과 협약을 맺는 과정에서 사명인 ‘한국화약(Korea Explosives Group)’이 영어권에서 테러 단체를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중국어로 표기하면 ‘남조선폭약집단’으로 해석되는 문제가 있었다. 포트폴리오 확장과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1992년 그룹명을 한화그룹으로 바꿨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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