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위로 비행기 떨어진 줄... 지진 20초가 몇년 같았다”
8일 밤(현지 시각) 규모 6.8의 강진이 강타한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고도(古都) 마라케시는 지진 발생 후 이틀이 지난 10일까지도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시내 중심가 골목에는 부서진 벽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고, 건물 외벽에 구멍이 뚫려 가구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집도 있었다. 마라케시의 자랑이던 옛 시가지 ‘메디나’의 붉은 성벽 곳곳은 금이 갔고, 일부 무너진 곳도 있었다. 마라케시의 관광 명소인 제마 엘프나 광장에서 만난 한 주민은 밤새 노숙하며 몸을 휘감았던 얇은 담요를 움켜쥐고 “여진이 언제 또 발생할지 몰라 지나가는 구급차만 보며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진이 땅을 흔든 시간이 20초 정도 된다고 하는데 나에겐 몇 년 같았다”고 말했다.
모로코 내무부 집계에 따르면, 이날 지진으로 최소 2012명(10일 오후 1시 현재)이 숨지고 2059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중 중상이 1404명인 데다 추가 수색과 구조 작업이 아직 이뤄지고 있어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모로코 중·남부에서 규모 6 이상의 지진이 발생한 것은 이 지역 지진 관측을 시작한 1900년 이후 처음이다.
지진은 8일 오후 11시 11분쯤 마라케시에서 남서쪽으로 75㎞ 떨어진 아틀라스산맥 지역의 알하우즈주(州) 오우카이메데네 마을 인근에서 발생했다. 진원의 깊이가 26㎞로 비교적 얕아 피해가 컸다. 알하우즈를 비롯해 진앙에서 남서쪽으로 80㎞가량 떨어진 타루단트 등도 피해가 커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
내진 설계가 되지 않은 건물이 많다는 점도 사상자가 늘어난 원인이었다. 특히 흙벽돌 집이 대부분인 진앙 인근 아미즈미즈, 물레이브라힘 등 시골 마을들은 집이 납작하게 무너져 내린 경우도 많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너진 집의 잔해에 올라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맨손으로 잔해를 뒤지고 있다고 CNN 등 외신은 전했다. 모로코 국영방송 2M은 “피해를 당한 많은 건물은 마라케시 주변의 붉은 바위산에 지어져 있었다. 이 마을들로 향하는 몇 안 되는 도로가 무너진 잔해에 막혀 구조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이 지역의 중상자들은 마라케시 시내 병원으로 분산돼 치료받고 있다. 대형 병원 중 하나인 이븐토파일 병원 앞에는 환자 보호자들이 모여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중환자실 면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압델카데르(33)씨는 “옆집 2층과 3층이 무너지면서 우리 부모님 집 안방과 거실을 덮쳤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라고 울먹였다. 그는 절박한 표정으로 메카(사우디아라비아 이슬람 성지)를 향해 계속 기도를 올렸다.
전통 시장과 식당, 카페 등 볼거리가 많은 마라케시 관광 명소 제마 엘프나 광장은 현지 주민들의 난민 캠프처럼 변했다. 한 여성은 모로코 국영방송 취재진을 붙잡고 “남편과 아이 넷이 모두 죽었다”며 이들의 이름인 ‘무스타파, 하산, 일헴, 기즐레인, 일리예스’를 울부짖었다. 그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이제 혼자”라고 외치기도 했다.
광장엔 지진으로 집이 파괴된 주민 수백 명이 텐트나 돗자리를 빽빽이 펼치고 드러누웠다. 한쪽에선 새벽 추위를 피하려고 피운 모닥불도 여전히 타고 있었다. 광장 근처 집에서 책을 가져와 모닥불에 던져 넣던 한 주민은 “집이 기울고 현관문이 저절로 열렸다 닫혔다 하는 상황을 한번 겪고 나니 도저히 집으론 갈 수가 없다”며 “집 위로 비행기가 떨어져 내린 줄 알았다”고 했다. 모로코군(軍)은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를 통해 “여진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고 안전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번 지진으로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옛 시가지 메디나의 건축물이 손상되는 등 유적 피해도 발생했다. ‘마라케시의 지붕’으로 불리며 도시의 상징 같은 역할을 해왔던 쿠투비아 모스크(이슬람 예배당)의 69m짜리 미나레트(등대 모양 탑)도 일부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고 인디펜던트는 전했다.
진앙 인근의 알하우즈 같은 시골 지역은 극심한 빈곤으로 내진 설계는커녕 제대로 된 건축 규정을 지키지 않은 집도 많아 피해가 특히 컸다. 전체 사망자의 65%(약 1300명)가 알하우즈에서 나왔다. 모로코 건축가협회의 전 회장인 오마르 파르카니는 뉴욕타임스(NYT)에 “많은 산골 지역 주민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건축가에게 돈을 낼 수가 없다. 직접 집을 짓는 경우가 많다 보니 건축물이 허술하고 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돌산으로 이뤄진 곳에 산자락을 따라 집이 붙어 있는 탓에 지진에 이은 산사태와 함께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집들이 속출했다. 산사태는 마을로 통하는 길마저 막아 구급차 등 구조 인력의 접근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번 지진은 1960년 남서부 해안 도시 아가디르에서 발생한 지진(규모 5.8) 이후 모로코에서 발생한 가장 강력한 지진이다. 1960년 지진은 모로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지진으로 해당 지역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1만2000~1만5000명이 숨졌다. 지진 규모는 이번 지진보다 약했으나 진원의 깊이가 15㎞로 더 얕아 피해가 컸다.
NYT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주요 수입원인 관광 산업이 타격을 받고 최근엔 극심한 가뭄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수입) 곡물 가격 상승 등으로 경제가 악화한 모로코에 이번 지진은 또 다른 어려움을 더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모로코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21년 3795달러에서 지난해 3528달러로 쪼그라든 상황이다.
한편 모로코의 사망자가 빠른 속도로 늘면서 각국 정상들의 애도와 지원 의사 표명도 잇따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10일 인도 뉴델리의 G20(20국) 정상 회의의 연설자로 나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데 대해 진심 어린 위로의 뜻을 전한다”며 “대한민국은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희생자들에 대해 “깊이 애도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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