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슬로 협정 30년… 이·팔의 평화공존을 멈출 순 없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정치 2023. 9.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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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중동천일야화]
그래픽=송윤혜

1993년 9월 13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체결된 오슬로 협정이 곧 30주년을 맞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맺은 이 협정의 공식 명칭은 ‘임시 자치 협약에 관한 원칙선언’ (Declaration of Principles on Interim Self-Government Arrangements)이다. 서명은 워싱턴에서 이루어졌는데 왜 오슬로 협정이라 부를까? 그해 1월부터 14차례 비밀 협상이 노르웨이 홀스트 외교장관의 중재로 오슬로에서 숨 가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반세기 이상 영토 분쟁을 종식시키고 두 국가로 나란히 서서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겠다는 약속을 담았다. 이른바 ‘두 국가 해법’의 첫 등장이었다.

협정은 완결태가 아니었다. 공식 명칭처럼 원칙에 대한 선언이자 논의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옛 도시 예리코의 자치권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측에 이양되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승인했고, PLO 역시 이스라엘을 대화 상대로 인정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전까지 이·팔 양측은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지만 협정 이후 각기 별개의 정부로 공존할 것을 다짐한 것이다. 협상은 이어졌다. 1995년 오슬로 2차 협정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독립 여정은 조금씩 더 구체화된다.

합의의 주역인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 시몬 페레스 외교장관 그리고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은 이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던 중동, 그중에서도 갈등의 핵심인 이·팔 분쟁의 평화적 해결은 곧 세계 평화의 전조(前兆)이기도 했다.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파국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1995년 11월 4일 라빈 총리가 유대 광신주의자의 손에 피살당하면서 상황은 요동쳤다. 협상은 지지부진해졌고 상호 적대감도 깊어졌다. 여전히 오슬로 협정은 이·팔 문제 해결의 유일한 해법으로 여겨지지만 ‘두 국가 해법’은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상찬하던 오슬로 협정에 제동이 걸린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쟁점 문제였다. 평화는 의지와 원칙 합의만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쉬운 평화협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팔 문제의 쟁점은 종교와 민족, 국제정치가 뒤얽혀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디테일에 숨은 악마들이 튀어나왔다. 30년 전, 이·팔 양측은 원칙에 먼저 합의하고 단계적 합의 구축의 토대를 만들었다. 2년 안에 최종 지위 협상을 개시하고, 5년 안에 영구 합의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로 가기 위한 의제들은 합의 자체가 어려웠다. 난민 귀환, 국경 획정, 정착촌 문제, 동예루살렘 영유권 등 어느 하나 녹록지 않았다. 평화 선언은 호기로웠지만 불가해한 난제 앞에 양측은 무력했다.

둘째, 국내 정치가 가로막았다. 양측 모두 일체의 양보를 거부하는 내부 강경파에게 끊임없이 시달렸다. 약속의 땅을 무도한 팔레스타인에 한 치도 내어줄 수 없다는 유대 근본주의자들을 이스라엘 정부가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이슬라믹 지하드도 문제였다. 이들은 침략자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며 아예 결사 항전을 천명했다. 양측의 극단주의자들은 적대적 공생 관계를 형성하며 판을 깼다. 평화를 위해 땅을 양보하며 공존하자는 온건 평화 노선은 점차 그 기반이 약해져 갔다.

셋째, 불편부당한 중재자가 아쉬웠다. 미국은 늘 강력한 중재자였다. 양측을 압박할 만한 힘도 있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친이스라엘 기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강한 힘을 가지고 불편부당한 입장을 취해야만 중재자의 존재감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팔레스타인 및 아랍 측에서는 미국의 편파적 중재를 늘 의심했고 문제 삼았다. 오바마 이후 중립 기조를 나타내기도 했으나 이제는 미국이 중동에서 점차 손을 떼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슬로 협정은 실패한 것일까? 30년 전 약속했던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코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협상 당사자로 인정하면서 아랍의 금기에서 벗어났다. PLO가 이스라엘을 대화 상대로 수용한 이상 아랍 국가들도 더 이상 이스라엘과 전쟁 상태를 유지할 이유는 없었다. 1994년, 이스라엘과 가장 긴 국경을 마주하며 적대적이었던 요르단과 평화협정을 맺는 성과도 얻었다. 이후 이스라엘의 국경 안보 상황은 급격히 안정됐다. 2020년 역사적 아브라함 협정까지 가게 된 데에는 어떻든 오슬로의 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국제사회는 팔레스타인이 나라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이젠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슬로 이전 팔레스타인은 단순 저항 집단 이미지가 강했으나 이제는 나름 정통성을 갖춘 국가 이미지를 확보했다. 미국의 반대로 아직 정식 회원국 지위를 얻지는 못했지만 2012년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옵서버 국가로 받아들였다. 다자 외교 무대에서 아랍연맹과 함께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30년을 맞는 오슬로 협정은 미완이다. 쟁점은 여전히 꼬여 있고, 리더십은 더욱 무력해지거나 극단화되고 있다. 분쟁도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 원칙의 합의는 유효하다. 오슬로 협정 이후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미 의회에서 한 연설은 인상적이다. 그가 백면서생 정치인이 아닌 6일 전쟁의 영웅, 라빈 장군이었기에 더욱 울림이 크다.

“군번 30743, 이스라엘 방위군 예비역 장군인 저는 지금은 평화의 군에 소속된 군인이라고 생각합니다. 27년간 군인으로 조국을 위해 복무한 저는 이제 죽음도, 부상도, 피 흘림도, 고통도 없는 전투에 나섭니다. 이 평화를 위한 전투야말로 우리 모두가 기쁘게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전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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