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414] 프리고진은 策士가 없었나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2023. 9. 1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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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에서 가장 볼 만한 대목은 ‘열전(列傳)’이다. 단편소설 같기도 하면서 문, 사, 철이 다 들어 있다. 열전 가운데서도 특히 ‘유협열전(遊俠列傳)’이 하이라이트이다. 깡패, 건달, 협객의 이야기들이다. 기존의 자료를 보고 쓴 글이 아니고 사마천이 강호에서 직접 이야기를 들었거나 취재해서 쓴 내용들이라는 점에서 글이 살아있다.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에 마련된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임시 추모 공간. /EPA 연합뉴스

이번에 비행기가 떨어져서 죽은 러시아의 용병대장 프리고진. 그의 인생사를 살펴보니 ‘유협열전’의 한 꼭지를 차지할 만 하다. 10대 후반부터 교도소를 들락거리다가 나와 길거리에서 핫도그 장사. 그러다가 식당을 했고, 고향이 같았던 푸틴이 이 식당에 드나들면서 인연이 깊어졌고, 결국 푸틴이 권력을 쥐면서 요리사로서 크렘린궁까지 같이 갔다. 러시아 군대의 급식을 담당하는 이권을 챙기면서 떼돈을 벌다가 국제 조폭, 즉 그림자 군대의 수장까지 맡게 된 과정이 너무 드라마틱하다. 이 팔자는 뭔 팔자란 말인가?

프리고진이 죽게 된 원인은 반란이었다. 반란을 일으켰으면 모스크바까지 쭉 뽑아서 결판을 봤어야지 왜 중간에 스톱했을까. 아니면 시작 하지를 말든가! 중간에 가다가 멈춘 부분이 곱씹어 볼 만한 대목이다. 프리고진 주변에는 브레인, 책사(策士)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주변에 주먹만 센 건달들만 있었던 것일까? 반란 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대사를 치를 때 옆에 책사나 브레인이 없으면 허둥댈 수 있다. 악수를 두기 쉽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고 마는 것이다.

10·26 저녁에 궁정동에서 총을 쏘고 난 후에 ‘육군본부로 갈까요? 정보부로 갈까요?’라고 운전기사가 물었을 때 김재규는 육군본부로 갔다. 지나고 보니까 이는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정보부로 갔어야 했다. 김재규도 책사가 없었던 것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도 밑바닥 건달 출신이었다. 10대 중반에 부잣집 머슴으로 살면서 주인집 소의 풀을 뜯기는 게 일이었다. 어느날 일을 하다가 옆에 친구들이 ‘소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주인집 소를 친구들과 함께 잡아먹는 배포와 도량이 있었다. 같이 소를 잡아 먹었던 친구들이 그 뒤로 주원장을 따라다녔다. 이후로 주원장은 탁발로 밥을 빌어먹던 떠돌이 중이 되었다. 무식했다. 그러나 이선장(李善長) 같은 책사를 만나 여러 군벌을 제치고 건국까지 성공했다. 브레인도 전생의 인연복이 있어야 엮어진다. 한국 현대사에서 놓고 보면 박정희의 김종필, 전두환의 허화평도 브레인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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