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차례 매축으로 항만 토대…6·25땐 전세 뒤집은 후방기지
- 전쟁중엔 숨겨진 제2전선 활약
- UN군 후방기지·피란민 구호소
- 국가재건까지 부두 5기로 버텨
- 70년대 新 부두 건설로 전성기
- 대한민국 수출경제 심장 역할
- 이젠 재개발로 미래 동력 박차
동산(東山)이란 산이 있었다. 옛 지도에 표기조차 안 되기도 했으니 산의 규모가 상상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랬던 동산이 19세기 말께부터 이방인들에 의해 촬영된 해안 풍경 속에 다소곳한 모습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동산의 이름은 언젠가부터 용미산으로 바뀌었다. 아마 송현산에서 용두산으로 이름이 바뀔 때 덩달아 바뀌었으리라. 동산은 일제가 부산부청을 건설하며 밀어내버렸다. 동산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진 지 1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부산에 동산의 의미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 자리가 바로 부산항의 북항과 남항을 구별 짓는 구분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동산에서 뻗어나간 영도다리가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영도다리를 중심으로 북(동)쪽 바다를 북항으로 남(서)쪽 바다를 남항이라 부른다. 연안여객부두 제1부두 제2부두 중앙부두 제3부두 제4부두, 제5부두와 6부두가 결합된 자성대부두 우암부두 감만부두 신선대부두로 이루어진 북항은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의 수출입을 책임지던 국제물류항으로서 기능을 한 뒤 십수 년 전부터 재개발(제1~6부두)이 진행되고 있다.
자갈치시장과 부산공동어시장으로 대변되는 남항은 우리나라 수산업의 보고로 기능하고 있다. 새벽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이곳의 왁자지껄함은 부산의 상징이요 힘이다. 수산시장들 건너편 영도의 대풍포 일대는 깡깡이마을이라 부르는 수리조선소들이 줄 서 있다. 이곳의 첫 조선소의 설립이 1887년으로 기록되니 목선을 짓고 배를 수리했던 남항의 기능이 136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다. 연이어 있는 두 항구의 기능과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달라 보인다. 북항은 부산을 이끌고 갈 미래 동력이 감돌며 기운차 보이나 남항은 애잔하고도 예스러운 정겨움이 넘쳐난다,
매립이 있었다지만 남항의 모습은 한 세기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반면 북항은 역동적으로 움직여 왔다. 1902년부터 7차례 매축을 통해 북항의 지형은 바뀌었다. 옛 연안부두(영도다리와 제1부두 사이) 자리에 시행된 제1, 2차 북빈매립공사의 결과로 제1부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한일병합 이전부터 일제가 항구 축조를 이리 서둘렀던 것은 부산항을 통해 대륙으로 진출하겠다는 ‘침략론’의 일환이었다.
부두 안으로 경부선 철로가 인입되어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출항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현재 부관페리호)의 각종 물자와 사람들이 경성(서울)으로 직접 연계되며, 도쿄~부산~경성~만주로 이어지는 대륙 침략의 교두보가 구축되었다. 이어진 영선산을 착평했던 부산항착평공사(1910년~1913년)를 통해 전관거류지(용두산 일원)와 서면 일대를 연결하는 도로(중앙로)가 개설될 수 있었다.
네 번째 매축(1914년~1918년)으로 제2부두 건설과 부산진 일대의 매축이 이루어졌고, 연이은 매축(1920년~1929년)은 남항의 골격을 형성했다. 영도다리 건설(1931.10~1934.11)을 핵심으로 했던 여섯 번째 매축은 1936년까지 이어졌고, 이후 영도는 일제의 병참기지로 또한 섬이 아닌 육지로 기능하게 되었다. 마지막 매축은 태평양전쟁기에 진행되어 중앙부두와 제3, 4부두를 탄생케 했다. 이로써 부산항은 총 5기의 부두로 해방을 맞았다.
부산은 30만 도시에서 귀국동포들의 귀환으로 40만 도시가 되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100여 만으로 추산되는 피란민을 끌어안았고, 결과적으로 불과 7여 년 만에 부산은 기존 인구에 3배가 넘는 100만 도시로 성장했다. 일제 침탈과 전쟁을 연이어 겪은 당시 대한민국은 새로운 부두를 축조할 능력이나 여력을 갖지 못했다.
전쟁 후유증을 딛고 국가 재건이 이루어졌던 1970년대 중반까지 약 30년 동안 5기의 부두로 버텨냈다. 그즈음 배후지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진행되었다. 철도시설이 부두 쪽으로 이동하며 확보된 선형의 넓은 터는 상업지역으로 변경되었고, 이러한 토지 이용 양상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 수출입 물동량은 기존 부두의 용량을 크게 넘어섰다. 30여 년 만에 비로소 정부는 신 부두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제5부두와 6부두는 자성대부두로 명명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물류부두가 되었다. 자성대부두 완공으로 부산항은 인력으로 화물을 저장·운반하던 벌크화물 시대에서 크레인과 컨테이너, 화물차가 세트로 움직이는 신 물류의 시대로 나아갔다. 연이어 제1, 2부두의 증개축과 8부두(우암부두), 감만부두, 신선대부두가 신설되며 부산항은 대한민국 수출경제 도약의 기반이 되었다.
다시 40여 년의 시간이 흘러, 자성대부두도 역할을 마치고 부산신항으로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 자성대부두는 북항재개발 2단계 사업지로 준비되고 있고, 최근 부산시는 55보급창과 8부두도 신선대부두 끝단으로 이전한 뒤 3단계 재개발에 대한 착수를 예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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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견인했던 부산항의 역할은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부산항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한국전쟁사의 기록 한 부분을 옮겨본다.
여기서 한국전쟁기 부산항 부두들의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엔군이 오갔던 제1부두와 주로 물자와 군수품이 들어왔던 제2~4부두의 역할이 전쟁을 대역전시킬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들었다”는 역할론에 대한 것이다. 한국전쟁기 중 부산항 부두들은 유엔군의 병참기지이자 후방기지였고, 눈에 보이지 않던 전쟁을 치러냈던 제2의 전선이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1950년 10월부터 시작된 유엔 중심의 피란민 구호활동은 휴전 후 3년이 지난 1956년까지 이어졌다. 유엔민사원조사령부, 유엔한국재건단 등을 중심으로 한 총 3132명의 의료인력, 총 42개국에서 지원한 783만2604달러 상당(1950.7~1956.6 사이)의 물자 등 의료·교육·건설·물품보급 등의 구호활동이 부산항을 기점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부산항은 유엔헌장의 최초 실천의 장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부산항은 전쟁을 역전시키며 대한민국을 구했고, 또한 냉전시대의 세계 평화를 지켜냈던 으뜸의 공로자였다. 따라서 부산항의 가치는 개항장이자 국제물류부두로서의 역할을 넘어, 국가 수호와 피란민 보호 그리고 60여 개 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의 지원을 연결하는 인류애의 상징물로 보아야 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어느 날, 부산항에는 이름 모를 하얀색 선박 3대가 정박해 있었다. 제1부두와 해상에 정박해 있던 그 배들은 암울했던 전쟁의 배경처럼 어두운 회색으로 물든 부산항의 한 가운데에 자리했던, 붉은 십자가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병원선들이었다. 전체 사망자(민간인 포함)만 120만에 달하며 피비린내 났던 전쟁 중에서도 부산은 평화와 치유를 얘기했던 도시였다. 국토의 끝단이자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관문에 자리한 부산과 그 중심이었던 부산항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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