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기억과 평화

강구열 2023. 9. 1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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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참사
당시 참상 증명 자료들 많은데
日 정부 부인하고 韓은 무관심
공론화 통해 평화 이끌어내야

지난달 간토대지진 100주년 관련 취재를 하면서 본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일본 요코하마 보생사(寶生寺) 위령비 앞에 놓인 조화(造花)다.

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을 추모하는 위령비는 쓸쓸해 보였다. 앞마당 곳곳에 잡초가 자라고, 건물도 꽤 낡은 절은 사람의 손길이 부족해 보였고, 그런 곳에 자리 잡은 위령비 역시 사정이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위령비 앞에 천으로 만든 꽃 두 다발이 놓여 있었다. 조화를 묶은 리본에 한국의 한 대학 이름과 함께 ‘기억과 평화’라는 문구가 쓰여 있어 눈길이 머물렀다. 꽃과 리본 모두 색이 많이 바래 오래전의 것인 듯싶었다.
강구열 도쿄 특파원
우리에게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이런 형태로 한 세기를 지나온 게 아닐까. 알고 있고 가슴이 아프지만 크고 지속적인 관심, 추모에는 이르지 못하는 역사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1923년 9월1일, 일본 수도권인 간토 지역을 강타한 최대 규모 7.9의 강력한 지진은 엄청난 피해를 낳았다. 사망, 실종자가 10만여명에 달했고 재산 피해는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대재앙의 와중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다. 일본 정부, 군대, 경찰이 생산하거나 방조한 헛소문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조선인이 많게는 6000명 이상이라 한다.

일본에서 당시 참상은 조작, 은폐되었다. 사회적 금기처럼 여겨져 발설이 쉽지도 않았다. 본격적으로 조사, 연구가 시작된 건 50년 정도가 지난 1970년대부터다. 한국에서는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수천 명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긴 하지만 우리와는 먼 일본에 있던 사람들이 겪은 피해라고 인식했다.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도 학살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 보상하라는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토대가 한·일 양국의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입장을 묻는 말에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지금까지와 다름없는 이런 입장이 얼마나 뻔뻔한 것인지는 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권고한 일본의 변호사협회, 내각부 보고서가 이미 발표된 바 있다는 점만으로도 알 수 있다.

학살을 증명하는 자료는 얼마 전에도 공개됐다. 지난 5일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대지진 당시 가나가와현 지사가 살해당한 145명에 대한 보고서를 내무성 경비 담당 간부에게 보냈다. ‘진재(震災·지진재해)에 따른 조선인 및 중국인에 관련된 범죄와 보호 상황, 그 외에 대한 조사의 건’이란 제목의 1923년 11월21일 자 보고서에는 범죄 시간과 장소, 내용, 피해자 주소 및 직업 등이 소상히 적혀 있다. 아사히는 “요코하마항 노동자였던 조선인 남성 42명이 9월2일 살해됐고, 가와사키 제철회사에서 일하다 4일 살해됐다는 조선인 이름은 신문에 보도된 피해자 이름과 일치한다”고 전했다.

사실 학살을 증언하는 자료는 이미 많이 확인됐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기억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 기억이 사죄는 물론 사실 인정마저 거부하는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많은 일본인을 일깨우는 토대가 될 것이다. 사과를 요구하는 데 관심이 없어 보이는 우리 정부를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데도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취재를 함께한 기자가 만난 한 전문가는 이런 말을 했다.

“사실관계를 파헤치는 연구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듣고 말을 이어 갈 수 있는 사회화가 100주년을 맞아 (한국 사회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요코하마 보생사 앞에 놓인 조화 리본에 쓰인 ‘기억과 평화’는 이런 생각을 담은 것이라는 게 내 나름의 해석이다. 2023년의 9월이 꼭 한 세기 전 간토 지역에서 우리 동포들이 겪었던 참상을 제대로 기억하고 전해 온전한 평화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길 기대한다.

강구열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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