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아의 조각보 세상] 쫄지마 페미니스트, 힘내라 시민운동
세계는 나아가려 몸부림치는데
한국은 뒤로 내달리고 있다
그러나 위축되지 말자
세계는 성평등·민주주의 향하고
한국민도 더 깊은 민주주의 꿈꿔
연구년을 맞아 스톡홀름에 왔다. 대학교수에게 주어지는 특권 중의 특권인 연구년은 그래서 더 부담스럽다. 강의 노동에서 벗어나 미뤄왔던 공부를 맘껏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특혜가 어디 있으랴. 게다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모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교육이란 노동을 면제받는 대신, 연구란 노동의 책임은 더 무겁다.
그래서 스웨덴을 선택했다. 스웨덴이란 나라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오래된 물음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성평등 제도와 문화를 갖고 있고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일하고 아이를 키운다는 현대사회의 신화를 써 온 나라다. 한국에서 유명한 ‘라테 파파’란 말은 정작 스웨덴에선 들을 수 없다지만, 스웨덴 남성들은 부드럽고 육아에 익숙하다. 이웃 덴마크 남성들이 ‘스웨덴 남자는 여자에게 연애하자는 말도 못한다’고 비웃는다지만, 그래서 여성들에게 더 인기다.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스톡홀름에 도착하면서 마주친 몇 가지 장면은 그사이 한국 언론에 보도된 사건들과 겹쳐 마음을 내내 무겁게 짓눌렀다.
장면 하나. 프랑크푸르트 대학(공식 명칭은 요한 볼프강 괴테 대학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하며 민주주의와 비판사회이론을 집대성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벤야민, 프롬 등의 대가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보켄하임 캠퍼스의 학생회관은 1층에 이주민, 연대 등을 외치는 그라피티가 전면을 차지한다. 이 중 절반은 ‘따르라, 페미니스트 남성’이라는 구호 아래 그려진, 남성들도 페미니즘에 동참하라는 벽화였다. 학생회관 2층엔 나치시대에 복무한 대학 교직원들의 사진과 이름, 기록이 전면에 걸려 있다. 잊지 말자는 메시지다.
장면 둘. 스톡홀름의 시립도서관은 스웨덴의 건축가 군나르 아스플룬드가 설계한, 붉은색과 원통형의 외관이 무척 아름다워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물이다. 4만여권의 장서를 갖췄다는 이 도서관에서 사회과학 도서실 2층의 한 서가는 모두 젠더와 페미니즘 도서로 가득 차 있다. 스웨덴어뿐 아니라 영어 도서도 적잖아 한나절을 이곳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장면 셋. 스웨덴에서 사는 한국인들을 만났다. 우파냐 좌파냐에 관계없이 정권이 어느 쪽으로 바뀌어도 성평등과 민주주의, 사회복지의 기본선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공통된 얘기였다.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중도우파가 극우정당의 눈치를 보긴 하지만, 이민 정책을 제외하곤 시민들에게 체감되는 큰 변화는 없다고 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의 조롱거리에 불과했던 극우정당이 점점 득세하게 된 현실을 걱정하긴 했지만,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 시간 접한 한국의 소식은 참담했다. 남산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기념물 철거 사건이다. 임옥상의 성추행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기억의 터는 임옥상 개인의 창작물이라기보다 집단의 의지를 모아 국민 모금으로 조성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2만여명의 시민들과 위안부 할머니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철거를 강행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시민운동이 죽었다’는 오세훈 시장의 말이다. 기념물에서 임옥상의 이름을 지우고 보존하자는 여성계의 주장을 여야 정치판 다툼으로 격하해 버리는 발상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한국의 여성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숙제인지 모를 뿐 아니라, 편협하기 그지없는 여야 대립으로 축소시켜버리다니 어처구니없다.
오 시장과 보수 정치인들이 틈만 나면 입에 올리는 ‘시민단체가 정부 돈을 현금인출기에서 빼다 쓰듯이 한다’는 말도 참담하다. 시민단체가 없다면 당신들 같은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마구잡이 행정을, 막가파식 정치를 누가 감시한단 말인가.
공천을 앞두고 쏟아지는 정치인들의 선동도 극에 달한 듯하다. ‘여성에게 가산점이나 주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라’는 허은아 의원의 국정 질의는 어떤 증거를 두고 한 말인지 궁금하다. 여성에게 가산점을 주는 곳이 많은지, 여성을 차별하는 곳이 많은지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바닥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한 후배가 말했다. ‘페미니스트’란 말조차 눈치 보게 만들고, 그래서 ‘성평등’이라고 했더니 지우라 하고, 공공도서관에서 민원이라는 구실로 성평등 성교육 도서를 버리라고 강요한다. 무지의 소산이자 시대를 거스르는 행위들이다. 세계는 지금 앞으로 나아가려 몸부림치는데, 한국은 뒤로, 바닥으로 내달린다. 그러나 위축되지 말자. 세계사회는 성평등과 민주주의를 향하고 있고 한국의 시민들도 더 깊은 민주주의를 꿈꾸고 있다. 여성과 남성 그리고 자신의 성별을 다르게 주장하는 모든 이들의 평등,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의 전선에서 싸우는 여러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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