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락자들의 반전 [조진만의 건축탐험]

2023. 9. 1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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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공간들과 건축물의 소개와 그 이면에 담긴 의미를 필자의 시선에 담아 소개한다. 건축과 도시 공간에서 유발되는 주요 이슈들과 사회문화적 의미를 통해 우리 삶과 시대의 의미도 함께 되새겨 본다.
고색창연한 석재 건축의 역사 도시 파리 중심부의 반항아와도 같은 퐁피두센터 ⓒMaureen

1992년 한 TV 프로그램의 신인 오디션에 출연한 서태지와 아이들. 첫 공중파 출연이라 무척 긴장된 표정이 화면 너머 고스란히 읽힌다. 그들은 '난 알아요'라는, 당시 국내에선 낯선 ‘랩’이란 장르로 실험적인 데뷔 무대를 치렀다. 그리고 네 명의 저명한 심사위원으로부터 10점 만점 중 7.8 점을 받았다. 사실상 탈락 점수였고 역대 출연자들 중 최저점이기도 했다. 심사평도 신랄하고 혹독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이 가요계를 휩쓸면서 ‘한국 대중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가 나왔다.

가수가 오디션을 보듯 건축가는 주로 설계 공모를 통해 평가된다. 아무리 유명한 건축가라도 설계자로 선택되지 않으면 작품은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 선택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설계는 시작된다.

설계 공모가 낳은 전설적인 명건축이 바로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다. 1954년 당시 233개의 응모작 중 덴마크의 젊은 건축가 예른 오베르 웃손(Jørn Oberg Utzon)은 물 위에 여러 개의 조개껍데기가 겹쳐진 모양의 설계안을 내놓아 '환상적인 유기체의 시상'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당선의 이면에는 시대를 앞서가는 심사위원의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 사실 그는 1차 심사에서 낙선작 그룹에 속했지만,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천재 건축가 에로 사리넨의 눈에 우연히 띄어 당선작으로 적극적으로 추천됐다. 당시 기술로는 구현할 수 없는 기술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사리넨은 그 이상의 가치를 본 것이리라. 이후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이 설계와 시공에 소요된다.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 대통령(재임기간 1969~1974)은 파리를 전 세계를 대표하는 문화예술 도시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대규모 문화센터 건립을 기획한다. 1969년 개최된 설계 공모에는 세계에서 무려 681개 팀이 참가해 주목받았다. 심사위원장이었던 건축가 장 푸르베는 당시 30대 무명이던 렌조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의 파격적인 안을 뽑았지만, 언론과 대중은 당선작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보통 건물 내부에 있어야 할 철골, 배관, 에스컬레이터까지 그대로 밖에 노출된 기계 미학의 하이테크 건축. 이런 건축물이 고전 건축의 심장부인 파리에 등장한 것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렇게 손가락질받은 미술관(퐁피두 센터)은 훗날 세계 현대미술의 요람이 된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등 대담하고 우아한 곡선의 건축가로 세계 각지에 랜드마크를 만든 자하 하디드. 데뷔 시절 그의 전위적인 디자인은 건축주들에게 외면받은 채 도면에만 머문 '종이 건축가'라는 딱지가 붙는다. 하지만 1982년 홍콩의 피크를 설계하는 국제 공모에 참여한다. 당시 심사위원장이던 일본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가 무심코 낙선작 더미를 다시 보다 그의 안을 발견하여 우연히 당선까지 하게 된다. 그는 이때 얻은 자신감과 명성을 토대로 점차 하나둘 미래 지향적인 건물이 만들어지고 많은 건축가의 추종과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서태지의 음악,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퐁피두 센터, 자하 하디드. 이들의 도전은 당시 세상의 기준과 마주했을 때 탈락작이거나 비판의 대상이었다. 매년 국내에도 수많은 공모전이 새로운 랜드마크 조성이라는 목표 아래 진행되고 있다.

사실 랜드마크를 계속 추진한다는 것 자체가 ‘제대로 된 랜드마크가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거니와, 랜드마크 건설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도 일부 단체장들은 해외 사례를 무조건 벤치마킹하는 등 임기 내 성과를 내기 위해 졸속으로 추진한다. 공모를 통해 만든다는 것은 현재 시점의 사회적, 기술적 기준과 잣대가 아닌, 멀리 100년 이후의 문화유산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신중한 진행’과 ‘과감한 평가’가 병행돼야 한다. 새로운 미래를 여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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