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시평] 대만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다

2023. 9. 1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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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다 잘사는 나라
고슴도치 전략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실리콘 방패도 갖췄다
궁극의 안전판은 뭘까

대만 동쪽 해안의 화롄에서 준봉들을 바라본다. 삐죽한 산들을 보며 고슴도치를 떠올리는 이는 몇이나 될까. 금강산 두 배 높이 산들이 즐비한 섬 전체가 고슴도치일까. 화롄의 산 밑에는 공군기가 숨어 있다. 200대가 들어간다는 지하 격납고도 있다. 하지만 전투기와 잠수함, 탱크를 늘리는 건 능사가 아니다. 중국이 침공하면 대만은 고슴도치처럼 싸워야 한다. 덩치와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포식자가 삼킬 수 없게 바늘을 곧추세워야 한다. 골리앗에게 맞서는 다윗은 기민하고 치명적이며 분산된 비대칭 전력을 써야 한다.

미 인도태평양사령관은 '할리우드부터 발리우드까지, 북극곰부터 펭귄까지' 지켜본다. 2021년 필립 데이비슨은 그 자리에서 중국이 6년 내 대만을 침공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쟁 시점에 관한 추측은 난무한다. 당장 2024년(미국, 대만 대선), 2027년(인민해방군 100주년, 21차 공산당대회)부터 2049년(중국 건국 100주년)까지 온갖 숫자가 나돈다. 작년 여름에는 중국 미사일이 처음으로 대만 상공을 갈랐다.

대만이 믿는 구석도 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전 도박으로 수렁에 빠졌다. 시진핑은 상륙 전쟁의 어려움과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를 다시 생각해볼 것이다. 대만은 아시아에서 싱가포르 다음으로 잘산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대체 불가의 전략 무기도 확보했다. 차이잉원 총통은 자국 반도체 산업을 '실리콘 방패'라고 했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의 60% 가까이 차지하는 TSMC가 핵이다. 대만 경제 기적의 아버지 리궈딩은 1960년대 말 전략적 선택을 했다. 대만 적화를 막으려면 어떻게든 미국 반도체 공급망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미국이 이 섬을 지키는 데 관심이 없더라도 텍사스인스트루먼트를 위해서는 나서지 않겠나. 단순 조립만으로는 부족했다. 중국이 적화될 때 미국으로 도망친 모리스 창은 그에게서 백지수표를 받아 새 판을 벌였다. 덕분에 대만은 미사일부터 인공지능까지 핵심 공급망의 병목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원한 병목은 없다. TSMC는 생산비가 50% 더 들어도 미국에 공장을 지어야 했다. 대만 정치인들은 USMC가 되는 것 아니냐며 반발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대만을 지켜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이 얼마나 희생을 감수할지는 미지수다. 이 섬을 서방이 끝까지 지켜주리라고 믿을 수 있을까. 대만이 무너져도 다른 나라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념 대결 구도로 안전을 보장받기도 쉽지 않다.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은 미·중 모두 실용적인 자세를 유지할 때 가능하다. 왕신셴 대만 국립정치대 교수는 "미·중 전략경쟁의 사이에 낀 국가들은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리콘 방패는 요긴하다. TSMC가 없다면 대만은 국제질서의 냉혹한 체스판에서 더 쉽게 희생될 수 있다. 하지만 방패만으로는 부족하다. 갑옷도 필요하다. 창검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지략과 무예가 중요하다. 궁극의 안전판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신속한 독립이나 통일을 원하는 대만 국민은 10%도 안 된다. 모두가 일단 현상유지를 바란다. 전쟁 위험은 커졌다고 느낀다. 하지만 대만은 싸울 준비가 돼 있을까. 이코노미스트지는 그렇지 않다고 전한다. 다가오는 대선은 분열을 키울 수 있다. 대만인들은 목숨을 걸고 협곡의 바위를 쪼아 길(중횡공로)을 뚫었다. 이제 그런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할 권위주의자는 없다. 16세기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대만을 '아름다운 섬'(일라 포르모자)이라고 불렀다. 마젤란은 태평양을 '평화로운 바다'(마르 파시피코)라고 했다. 그 이름들이 어떤 역설도 없이 온전히 지켜지기를 바란다. 우리 역시 같은 바다 위에 있고 아름다운 땅을 지켜야 한다.

[장경덕 작가·전 매일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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