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1)
부서 회식 날이었다. 그날따라 팀 서무를 맡고 있는 김 선배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달랐다. 1차 식사 자리를 마치고 2차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이동 중의 혼란을 틈타 선배를 끌고 나왔다. 무슨 일 있냐고 물으니 병원에 가야 한다고 답한다. 본인이 아니라 형수 때문이라는데 아이를 낳았단다. 반나절이나 지났단다. 이 곰 같은 양반아, 진작 가야지 아직도 이러고 있나. 그런데 우리 둘 다 부장의 반응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네 처가 낳았지 네가 낳았냐는.
2차 자리 들어가지 말고 병원에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부장은 내가 커버하겠노라며. 김 선배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떠났다. 저 멀리 택시 잡는다고 연신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혼자 술자리로 복귀했다. 그놈 어디 갔냐고 묻는다. 출산했다고, 병원에 갔다고 답했다. 예상대로 부장은 말했다. "지가 낳았나? 그런데, 아들이래? 딸이래?"(부장은 다음 날 산모에게 큼직한 과일 바구니와 축하 메시지를 보내줬다.)
얼마 전 김 선배와 그때 일을 이야기했다. "그랬나…" 하며 얼버무린다. 기억이 흐려졌는지, 스스로 흐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덧붙이는 거였다. 다행히 둘째였다는 것. 첫아이 때는 곁을 지켰으므로 둘째 때엔 그래도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었다며,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 같았다. 암튼 그때 그 아이는 지금쯤 서른을 향해가는 나이가 됐을 거다. 소심하면서도 담대한 아빠와 혼자서도 굳센 엄마 밑에서 잘 컸으리라.
또 다른 장면. 갓 결혼한 부서 막내 집들이에 갔다. 부장은 격려한다며 임신을 기다리는 제수씨에게 폭탄주를 권했다. 몇 차례나 손사래를 치다가 제수씨는 결국 받아 마셨다.
야만의 시절이었다. Y2K 이전 1990년대 중반 일이니 아주 오래전도 아니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알 수 없다. 그때는 회사 일이 개인 사정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부서 회식 따위에도 그랬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폭력에 대해 큰 저항 없이 살았다. 그럼에도 그 폭력의 행위자를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아니, 상상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런데 머리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데 몸은 가끔 잊는다. 그 시절 습관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위태롭다. 그나마 세월따라 교육도 받고 해서 잘 안 물어보는 것도 생겼다. 연애를 하는지, 결혼 혹은 이혼을 했는지, 아이는 몇 살인지, 공부 잘하는지, 집에는 잘 들어가는지…. 그리고 휴가를 내는 직원에게 그 이유도 묻지 않는다.
근데 어떤 건 묻고 싶고, 종종 묻곤 한다. 지금 일은 할 만한지, 그리고 뭐 도와줄 건 없는지.
(이 글에 호출된 선배와 후배는 모 신문사 임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들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실명 기재를 피하고자 한다.)
[김영태 코레일유통(주)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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