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빗고 글은 덜어내야…문체를 쌓아가는 법
지난번 글에 ‘문체는 곧 그 사람이다’라고 했죠. 이렇게 말하고 나니 글 쓰는 데 부담감을 더 안겨주겠다 싶더군요. ‘글이 이렇게 진부하고 지지부진한 걸 보니, 내 삶도 이 모양 이 꼴인가?’라는 생각에 글쓰기가 싫어지고 자신감을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나의 한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글을 쓰지 말아야겠다!
분명히, 문체는 글쓴이의 목소리이자 글쓴이 고유의 표현 양식입니다. 글과 글쓴이의 삶은 닮았습니다. 굳이 이 진리의 말에 사족을 달자면, 글쓰기를 통해 사람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고귀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다 보면 고귀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글을 쓰다보면 예의를 지키면서도 비굴하지 않은 자세, 단호하면서도 정중한 자세, 이기심보다는 이타심을 가지려는 자세,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현실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자세, 온갖 변수를 고려하면서도 길을 찾아내는 자세를 갖출 수 있습니다. 글을 쓰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글 쓰는 용기를 잃지 마세요.
인격을 갖춰나가는 글쓴이가 되기 위해 두 가지만 얘기해보겠습니다. 하나는 번역한다는 자세, 다른 하나는 간결함의 추구.
“My mother died”를 번역해보세요
우리가 쓰는 글은 대부분 산문입니다. 넓은 의미로 수필이라 할 수 있죠. ‘수필’을 정의할 때 늘 나오는 말이 있죠. ‘붓 가는 대로’, 또는 ‘생각나는 대로’. 기억나시죠? 떠오른 생각을 솔직담백하게 쓰면 글이 된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생각나는 걸 그대로 옮겨 쓰면 글이 될까요? 이 말이야말로 글쓰기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생각나는 대로 썼는데 글이 시원찮으니 좌절감을 안겨주죠. 글쓰기와 인격이 서로 성장하는 걸 가로막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지 마세요. 생각과 글은 다릅니다. 물론 생각도 말로 이루어져 있어 이 둘을 엄격히 나누는 건 무리입니다. 하지만 일단 이 둘을 나눠놓고 봅시다. ‘생각’은 자고 일어났을 때 헝클어진 머리 같습니다. 한쪽은 눌려 있고 다른 쪽은 삐죽삐죽 뻗쳐 있죠. 부스스한 상태로 사람을 만나면 스스로 부끄럽거나 예의 없다고 핀잔을 듣기 십상입니다. 집 밖에 나가려면 머리를 감고 곱게 빗질해야 합니다.
‘글’은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는 게 아닙니다. 글은 생각을 ‘번역’하는 겁니다. 생각은 한 줄로 가지런히 정돈되지 않고, 엉킨 실타래처럼 한 덩어리로 뭉쳐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사진과 비슷합니다. 한 장의 사진에 여러 사물이 동시에 찍혀 있듯이,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느낌이나 사건이 불쑥 솟아오르긴 하는데, 언어로 분화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그걸 글로 곱게 펼쳐야 합니다. 생각을 곧바로 쓰는 게 아니라, 생각을 글로 천천히 번역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My mother died”를 번역하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간단한 영어이지만 꽤 여러 문장이 떠오릅니다. 직역하면 ‘나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뭔가 어색하군요. 언어마다 즐겨 표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으니까요. 한국어로 ‘나의 어머니’보다는 ‘우리 어머니’가 자연스럽겠어요. ‘우리 어머니가 죽었다’가 될 텐데, 이것만 있지 않죠. ‘우리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우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어머니가 숨졌다’ ‘우리 어머니께서 숨을 거두셨다’ ‘우리 엄마가 세상을 등졌다’ 등등. 어이쿠, ‘모친께서 운명하셨다’도 있군요.
‘my’를 ‘나의’라 할지 ‘우리’라 할지, ‘mother’를 ‘엄마’라 할지 ‘어머니’라 할지, 어머니 다음에 올 조사를 ‘-께서’로 할지 ‘-가’로 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died’는 ‘죽었다, 돌아가셨다, 숨졌다, 숨을 거두셨다, 세상을 등졌다, 소천하셨다, 운명하셨다’ 등 선택할 후보가 많네요. 저라면 이렇게 번역할 것 같아요.
‘엄마가 죽었다.’
어떤가요? 버릇없고 싸늘해 보이나요?(여하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글쓴이의 ‘태도’를 보여주는 건 분명하군요). ‘우리’를 안 써도 돌아가신 분이 글쓴이의 어머니임을 알 수 있어 지웠습니다. ‘어머니’보다 ‘엄마’라고 쓰는 게 그분과 정서적으로 가깝다는 걸 보여주기도 하네요. 반면에 ‘-께서’보다는 ‘-가’를, ‘돌아가셨다’보다는 ‘죽었다’고 하는 게 독자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좀더 객관적으로 전달하고 감정을 절제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에 감정을 과하게 보태지 않는 게 정확해 보이긴 하네요.
가장 빨리 떠오른 말은 ‘독’
이렇듯 번역은 수많은 후보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뜻이 되네요. ‘엄마가 죽었다’라는 문장만이 ‘My mother died’라는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각과 글 사이에 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적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틈을 더 많이 벌려야 합니다. 특히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일상의 경험과 직접 연결돼 있습니다. 경험과 직접 연결된 말, 머릿속에 가장 빠르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 이게 글쓰기의 독입니다. 경험과 연결된 언어는 생활언어에 속합니다. 절경을 보고 ‘와, 멋지다’, 무례한 사람을 만났을 때 ‘열 받네’, 벽에 머리를 부딪혔을 때 ‘아, 아파라’, 피곤할 때 ‘아, 졸려’ 이런 것들이죠. 그게 경험을 가장 잘 나타내는 현실적 감각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언어라기보다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생각과 글은 일대일 관계가 아닙니다. 경험과 글도 일대일 관계가 아닙니다. ‘I don’t know myself’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곧바로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르겠다’고 쓰고 만족해하는 게 아니라, 멈칫하고 이를 어떤 ‘문장’으로 ‘번역’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게 나만의 문체를 고민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나는 내가 낯설다’ ‘나는 내가 그립다’ ‘내 속엔 수많은 타인이 앉아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 따위의 문장을 떠올려야 자기만의 문체가 마련됩니다.
글을 여러 번 썼는데도 나만의 문체를 찾기 어려운 것은 매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썼기 때문 아닐까요. 멈춰서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번역하는 마음’으로, 다시 말해 ‘낯선 언어’로 바꾸려는 자세로 쓰지 않으면 나만의 문체를 찾기 어렵습니다.
문체에 대한 감각은 말에 대한 감각입니다. 말을 외국어처럼 쓰려고 해야 합니다. 술술 나오는 걸 과신하지 말고, 머뭇거리며 어렵게 나오는 말을 더 신뢰해야 합니다. 아직 나오지 않은 말을 찾아내야 합니다.
다행히(!) 생각에 비해 글은 느립니다. 되돌릴 수도 있습니다. 지우고 고치고 다시 쓸 수 있죠.
나의 감정은 남의 일처럼
간결함이란 군더더기를 덜어낸다는 뜻인데, 무조건 문장을 짧게 쓰라는 뜻은 아닙니다. 간결함은 감정을 조절하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자신의 글에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을 지나치게 담으려 하면 간결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슬플 때 너무 슬퍼하지 않고, 기쁠 때 너무 기뻐하지 않는 것. 너무 들뜨거나 가라앉지 않는 것. 어쩌면 간결함은 무심함에 가깝습니다. 내 감정을 마치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적어 내려가는 것. 그럴 때 글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인 ‘명료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명료함은 글에 생각이 뚜렷하고 분명하게 드러날 때 느낄 수 있습니다. 문체를 현대적으로 정의하면 ‘적절성, 명료성, 미학성 등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독특한 표현 양식’입니다. 여기에도 명료함이 거론되는군요.
글을 쓰다보면 감정이 덜 드러나기보다는 과잉되게 담기는 일이 잦습니다. 감정에 격동이 생겼으니 기억에도 남고 글을 쓰겠다는 마음도 생겼겠죠.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웃긴 얘기를 하면서 먼저 웃으면 김새듯이, 문장에 감정이 과잉되게 드러나면 그 마음이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예를 하나 보죠.
‘천근같이 무거운 발을 질질 끌고 나와 간신히 식탁 의자에 앉아서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독자 리아님)
아들의 합격 여부가 발표되는 날 아침의 심란하고 불안한 상황을 묘사한 문장입니다. 그런데 심란한 상황과 심란한 문장은 다릅니다. 마음이 심란하다고 문장마저 심란해서는 곤란합니다. ‘천근같이 무거운 발, 질질 끌고 나와, 간신히, 멍하니’ 같은 표현은 자신의 불안한 심리를 걸러내지 않고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문장이 심란해졌죠. 이런 걸 덜어내면 어떨까요.
‘무거운 발로 식탁 의자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수식을 과하게 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았다’고만 해도 불안한 마음이 전달됩니다. 글쓴이는 자신이 쓸 수 있는 만큼만 간결하게 쓰되, 나머지는 독자에게 맡겨야 합니다. 독자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독자 머릿속에 자기 감정과 경험을 고스란히 욱여넣으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군더더기를 붙일수록 독자는 지치고 상황은 전달되지 않습니다.
간결한 마음이 명확한 문장을 만든다
이런 자세로 문장을 쓰다보면 결과적으로 문장이 짧아집니다. 묘하게도 문장은 짧을수록 힘이 생깁니다. 그러니 ‘간결하게 쓰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결하게 쓰려는 마음을 갖추면, 길어도 생각이 명확히 담기는 문장을 쓸 수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헤어가 있어야 헤어스타일도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없는데 머리모양을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옷장에 옷이 몇 벌 걸려 있어야 상황에 맞게 멋을 부릴 수 있죠. 어느 정도 글이 쌓여야 자기 문체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어떤 문체를 갖고 있는가?’라고 묻기 위해서라도 ‘자기 글’이라는 옷을 여러 벌 쌓아나가길 바랍니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 <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독자 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는 글감으로 아홉 편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취직 합격 소식(보라님),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나서 들은 대입 합격 소식(정선님), 아들의 대학원 합격 소식(리아님), 본인의 기적적인 대학 합격 소식(담이님), 육아의 순간순간 느끼는 행복감(초록님), 이가 빠진 문장을 기억하면서 느끼는 행복(선옥님), ‘지금 이 순간’(서화님, 순권님, 숙연님).
대부분 1천 자 분량을 넘치게 쓰셨더군요. 최고의 순간이니 글이 술술 나왔나 봅니다. 특히 시한부 삶을 살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일상의 평온함과 행복감으로 살고 계신 서화님의 글은 존경심과 종교인의 경건함을 느끼게 합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하고 싶은 게 생겨나기를 기다린다는 숙연님의 글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구도자의 모습을 엿봅니다.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초조한 순간에 불쑥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봤다는 정선님의 초연함과 엉뚱함에 부러움이 생기더군요.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제가 조건을 하나 달았죠. 글 속에 ‘그때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는 식의 문장을 ‘절대로’ 쓰지 말아보라고. 그런데도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나봐요. 그 장면이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듯이. 하하.
앞에서 ‘간결함’에 대해 얘기했는데, 보내주신 글에선 간결함보다는 기쁨의 감정이 뿜어져 나오더군요. 감정이 과잉되거나 들떠 있었습니다. 한번 볼까요? ‘진한 기쁨이 솟구쳐 올랐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안구건조증이 있는데도 눈물이 난다.’ ‘바로 ○○가 내 삶에서 가장 빛나고 행복한 시간이다.’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은 바로 ○○이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전율이 오르고 몸이 붕 뜨는 것 같다.’
권투선수는 발차기를 하지 않습니다. 탁구선수는 공을 손으로 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일이나 일정한 조건(한계)이 주어지죠. 글쓰기에도 이런저런 조건이 붙습니다. 완전한 자유는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조건에 맞춰 연습해야 나중에 자유자재할 수 있습니다.
매번 글을 보내는 담이님에게는 따로 한마디 거들어야겠네요.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구분했으면 좋겠어요. ‘굳이 이 글에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이 뭔지 찾아 과감히 덜어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예비 합격 순번이 꽤 뒤였는데 합격 통지를 받아 기뻤다는 글을 쓰기 위해 굳이 ‘당신은 기적을 믿는가?’라고 시작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이러면 얘기가 길어지겠죠. ‘누구는 기적을 안 믿고 누구는 믿고, 나는 어떻고. 그런데 나에게 기적적인 일이 생겼다.’ 우주의 창대함과 세상의 진리를 글 한 편에 다 담으려 하지 말기 바랍니다. 다른 분들께도 드리고 싶은 얘기라 좀 길게 썼습니다. 욕심내지 말고 간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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