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공포가 우리 집 침실로 들어왔다
개봉도 전에 화제…칸 시작으로 국제영화제 초청 줄 이어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 《잠》은 외적으로 먼저 화제가 된 영화다. 정식 개봉 전에 가장 처음으로 획득한 영광의 타이틀은 제76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상영작. 이를 신호탄으로 토론토, 시체스 등 국제영화제 초청이 잇따르고 있다. 장편 데뷔작을 내놓은 감독의 이력에 일단 믿음직한 기대감을 얹을 수 있게 하는 행보다.
더군다나 유재선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 연출부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봉준호 키즈'로 불리고 있다. "최근 10년간 본 것 중 가장 유니크한 영화"라는 봉 감독의 호의적 평가도 《잠》에는 호재로 작용한다. 요즘 한국 상업영화에서는 흔치 않은 규격으로 던진 출사표도 눈길을 끈다. 순제작비 50억원대의 중급 사이즈, 100분이 넘지 않는 경제적 러닝타임. 충분한 외적 호감을 끈 《잠》은 과연 어떤 내실을 갖춘 영화일까. 확실한 첫인상은, 단순한 공포영화로 분류하기에는 망설여진다는 점이다. 다행히 좋은 의미에서다.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현대의학과 샤머니즘이 충돌하는 무대
누구나 잠을 잔다. 수면의 질과 지속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잠》은 미지의 공포가 아닌 이토록 일상적인 풍경의 틈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검은 화면에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우렁찬 코골이는 《잠》으로의 초대를 알리는 일종의 알람이다. 주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이 시작으로부터 영화는 조금씩 이야기의 무대를 공개한다. 단출하지만, 만만치 않게 혼란한 상황들이 이곳에 오른다.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는 곧 첫아이의 출산을 앞둔 젊은 부부다. 현수의 이상 증세는 불현듯 시작됐다. "누가 들어왔어." 잠에서 깨 느닷없는 한마디를 던진 현수. 이 말을 대수롭지 않은 잠꼬대로 여기기엔 현수의 기이한 행동이 밤마다 이어진다. 피가 날 때까지 얼굴을 긁는가 하면, 냉장고로 가서 생고기와 날 생선을 우걱우걱 씹어먹는 모습은 수진에게 공포 그 자체다. 불러도 대답 없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현수는 급기야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부는 수면클리닉을 찾고, 현수의 증세가 '렘수면 행동장애'라는 진단을 받는다.
영화가 제안하는 경로는 사실 단순하다. 현수와 수진, 두 사람 중 누구의 시각을 따라갈 것인가. 《잠》은 총 세 개의 장(場) 구성이다. 부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수면클리닉의 치료법을 따르는 것이 1장, 수진의 어머니가 집으로 데려온 용하다는 무속인의 등장이 2장이다. 이 안에서 현수와 수진의 입장이 조금씩 갈린다. 출산이 임박한 수진에게 현수의 상태는 극복해야 할 문제다. 마침 수진이 종교의 율법처럼 생각하는 가훈이 '둘이 함께하면 극복 못 할 일이 없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어쩌면 쉽사리 극복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의학적 치료 방식에 전념하던 수진은 점차 무속인의 해석을 맹신하는 눈치다. 죽은 자의 영혼이 현수에게 씌었다는 것이다. "누가 들어왔어"라던 현수의 잠꼬대도 수진의 확신을 부추긴다.
반면 연극배우이자 TV 드라마에 단역으로 조금씩 얼굴을 비치는 중인 현수는 "누가 들어왔어"가 달달 외우던 대사였다고 항변한다. 수면클리닉의 처방에서 벗어나 점차 샤머니즘 방식에 경도되는 수진의 증세도 부담이다. 침실에 걸린 자물쇠, 창문을 막아버린 철창 등은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점차 감금의 공간으로 뒤바꾼다. 부적과 주술까지 함께 하는 침대는 나중에는 급기야 작은 제단처럼 보일 정도다. 수진과 현수의 집은 이제 현대의학과 샤머니즘, 이성과 비이성이 뒤엉킨 기이한 무대다.
제한적인 공간과 등장인물,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사용한 장 구성 등은 《잠》을 연극적 상황으로 바라보게 한다. 마침 현수의 직업 역시 배우이며, 그는 수진의 말에 따르면 "오빠처럼 연기 잘하는 사람은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영화 속 시간은 순차적으로 흐르지만 장이 바뀔 때마다 약간의 공백이 생긴다. 이 의도적인 점프는 《잠》이 게임을 건네는 방식이다. 관객이 상상력으로 각자의 해석을 채워넣길 유도하는 것이다. 보는 이의 참여를 어렵지 않게 유도하고, 영화를 보며 떠오르는 의문에는 '보여주지 않음'으로 답하는 영리한 구성이다. 이를테면 수진은 왜 현수의 증세를 휴대폰 카메라로 녹화하지 않는가. 어쩌면 2장과 3장 사이, 우리가 목격하지 못한 가려진 시간 사이에 이미 시도해본 방식일지 모른다.
현대적 강박이 빚은 공포
표면적으로는 수면 중 이상행동을 고치려는 부부의 사투지만, 더 넓은 해석도 가능하다. 젊은 부부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공포를 장르영화의 성격으로 풀어낸 작품이라는 점에서다. 평온했던 일상은 흔들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고 믿는 사람은 내게 위협을 가할지 모르는 존재로 바뀐다. 공동주택의 층간 소음 민원은 부부에게 스트레스를 안기고, 이웃의 원치 않는 관심 또한 이들을 예민하게 자극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함께하는 게 부부임을 잊지 않으려는 수진의 의지는 타인에 의해 상처받는다. 영화에 구체적으로 등장하진 않지만, 나이에 비해 조금은 보수적인 수진의 결혼관은 한 부모 가정에서 나고 자란 자신의 배경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남편과 함께 가정을 지키려는 수진에게 친정 엄마와 아랫집에 새로 이사 온 이웃은 "(힘들면) 이혼하라"는 말을 건넨다.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를 꾸리고 지키며 영위하는 것의 어려움, 한 생명을 낳고 기르는 고난, 친절을 가장한 외부의 공격, 편하게 머물러야 할 공간인 내 집마저 더는 안전하지 않다는 현대적 강박은 《잠》이 출발한 공포의 진정한 배경일 것이다.
《잠》을 단순한 공포영화로 분류하기 망설여진다는 표현을 설명할 차례다. 침대 밑에는 정체 모를 피가 선연하고, 인물들의 발작적인 증세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영화는 독특한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수면클리닉 의사(윤경호)의 허허실실함, 집착적으로 야무진 수진과 헐렁한 현수의 성격 대비, 중요한 순간에 대기업 직원의 특기를 살린 비장의 무기로 PPT를 꺼내 상황을 정리하는 수진의 태도 등은 《잠》이 심어둔 숨 쉴 구멍이다. 잠의 비극이 만든 무대의 끝에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방식 중 결국 승리하는 것은 어느 쪽인가. 마지막 장면의 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해답은 명쾌하다. 당신은 현수와 수진, 두 사람 중 누구의 시각을 선택해 이야기를 이해할 것인가. 《잠》을 보는 내내 이 '게임의 법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네 번째 만남
이선균과 정유미는 《첩첩산중》(2009), 《옥희의 영화》(2010), 《우리 선희》(2013)에서 연인으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잠》이 두 배우의 네 번째 만남인 셈. 수진과 현수 두 사람이 거의 모든 장면을 끌고 가는 세팅 안에서 각자의 매력과 호흡이 빛을 발한다. 진중하다가도 엉뚱한 매력을 뿜는 정유미 특유의 박자, 내내 억눌린 듯 보이다가도 '혼신의 한 방'을 보여줄 줄 아는 이선균의 조화는 《잠》을 목격하는 큰 재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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