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해서 어느 세월에 부자?…‘이 분’ 한마디 하던 시절엔 그게 되더라 [대통령의 연설]

문재용 기자(moon.jaeyong@mk.co.kr) 2023. 9. 1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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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제1회저축의날행사참석연설(1964)
최근 새마을금고가 최고 연 5.8%의 금리를 제공하는 정기예금을 내놓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서울·경기 지역의 일부 새마을금고가 선보인 이 상품은 기본금리도 5.5%로 높고 만기 자동이체를 비롯한 간단한 조건만 갖추면 5.8%의 최고금리가 적용된다고 하는데요.

저축은행을 비롯한 제2금융권의 예금 금리가 연 4%대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새마을금고 상품이 등장하며 금융기관들 사이에 다시 치열한 예적금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란 관측이 많습니다. 우리·하나은행 등 1금융권에서도 경쟁적으로 금리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죠.

예적금 금리가 치솟았던 지난해 가을에는 한달에 정기예금에만 40조원에 달하는 신규가입액이 몰려든 적도 있었는데요. 지난 몇년동안은 부동산·주식·가상자산 등의 재테크 방식이 인기를 끌었지만, 대한민국 수십년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재테크 상품은 역시 예적금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모습이었습니다.

한국이 반세기만에 급격한 경제성장을 일궈내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예금은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고, 그만큼 정부 정책도 역동적으로 변화해왔는데요. 특히나 금융기관 금리를 정부와 금융당국이 직접 규제하던 1990년대 중반까지는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는 ‘관치금융’이 횡행했죠. 요즘에는 관치금융이란 표현이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당시에는 민간 금융시스템이 성숙되지 못해 어느정도 불가피한 관치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의 연설 이번 회차에서는 예금과 예금제도에 대한 역대 대통령의 언급을 되짚어보려 합니다.

경제개발계획의 ‘근간’ 금리현실화...예금금리 연 15%→30%로
예금이 처음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등장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 당시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던 한국은 개발자금 대부분을 외국에서 차입해올 수밖에 없었는데요.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본격화되며 국내저축을 증가시켜 투자재원을 조달하는 계획이 시행되죠.

대표적인 게 1965년 취해진 금리현실화 조치입니다. 이전까지 예금금리가 너무 낮아 당시의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저축할 유인이 없는 수준이었다고 하는데요. 놀랍게도 물가상승률보다 낮았다는 금리가 연 15%에 달했다고 하네요. 박 전 대통령이 취한 금리현실화는 이를 연 30%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박 전 대통령은 연초마다 예금액의 증가세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됐죠.

이같은 정책이 잘 소개돼있는 연설문이 1965년 9월에 발표된 ‘범국민저축운동에 즈음한 담화문’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담화문을 통해 “해방 후 20년동안 우리 국민은 해외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분에 넘치는 사치와 허식적인 소비습성에 젖어 눈앞의 오늘에만 관심을 갖고 내일을 설계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평하며 “그러나 이제라도 국민모두가 일치합심하여 자립에의 굳센 의지로써 이를 악물로 땀흘려 일하며 아끼고 저축하면, 우리도 멀지않아 부강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입니다”라 강조했습니다.

담화문에 말미에는 “정부는 물가안정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하고 있는 동시에, 예금자의 이익보호를 위하여 조속한 시일내에 적절한 금리현실화를 추진함으로써 저축을 증가하기 위한 분위기를 마련하고자 하고 있읍니다”라며 금리현실화 조치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오늘날 ‘금융의 날(10월 마지막 화요일)’의 전신인 저축의 날을 만들기도 했는데요. 1964년도에 9월 21일이 저축의 날로 지정됐으며 이듬해에는 9월 25일로 조정됐습니다. 1973년에는 ‘증권의 날(5월 3일)’과 ‘보험의 날(11월 21일)’이 저축의 날로 통합됐고, 이후 두차례 날짜변경을 거쳐 2016년 오늘날의 형태로 자리잡았습니다.

전후 첫 긴급명령 금융실명제...김영삼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 = 연합뉴스]
이후 예금제도가 정책소재로 등장한 것은 금융실명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부터입니다. 금융실명제를 시행한 것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란 점이 잘 알려져있지만 논의가 시작된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인데요. 당시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사기사건이 군부정권의 비자금 의혹까지 번져가자 금융실명제 논의가 시작된 것이죠. 이때만해도 금융실명제란 표현 없이 정책을 발표 날짜를 따와서 7·3조치로 주로 소개됐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1982년 7월 ‘진해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7·3조치는 모든 금융거래의 실명화를 통해서 그 동안 누적되어 온 금융제도와 세제면에서의 부조리를 제거함으로써 정당한 노력을 한 사람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갈 수 있는 경제적 정의사회구현을 위한 구상”이라 소개했습니다.

금융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 시기입니다. 1993년 8월 12일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급작스레 시행돼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도 알지 못했을 정도라고 알려졌습니다. ‘금융실명제 실시 관련 담화문(금융실명제는 개혁 중의 개혁)’이라 명명된 연설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은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라며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가 없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이어서 “제 이름 석자로 예금하는 이 제도가 실시되기까지 우리는 참으로 긴 세월 동안 방황하였습니다”라며 “국회에서 공개적인 논의를 통해 법률을 개정하자면, 예상되는 부작용이 너무도 큽니다. 고심한 끝에, 저는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국회에서의 법개정 절차를 대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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