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 빚 지는 일

한겨레 2023. 9. 1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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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대뜸 말했다.

"카메라 없다고 생각하시고 평소처럼 해주시면 돼요, 편안하게요"라는 말을 반복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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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말고] 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근데 방송국이 있어도 막상 연예인 볼 일이 없다, 맞제?”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대뜸 말했다. 우리 회사와 함께 사옥을 나눠 쓰고 있는 보험사 직원 같았다. 곁에 서 있던 그의 동료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맞다, 생판 아저씨들뿐이고.” 대답과 동시에 고요했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연예인 대신 주야장천 이 건물을 오가고 있는 아저씨 선배들이 구석에서 함께 킥킥대고 있었다.

서울의 전국 단위 방송국과 달리 지역 방송국에선 연예인을 보기가 쉽지 않다. 지역 방송국의 회당 제작비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유명 연예인 섭외는 엄두도 못 낼 만큼 예산 사정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두분은 앞으로도 연예인 아닌 생판 아저씨들만 보게 될 확률이 높다.

지역 방송의 주인공이 되는 건 대체로 이곳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다. 직업도, 나이도, 생김새도 다르지만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는 점만은 비슷하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둥그런 카메라 렌즈를 마주하고 서면 자꾸만 마른 침을 삼키고, 표정과 시선 처리는 한없이 어색해지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이들을 촬영할 때면 소극적인 성격에 맞지 않게 너스레를 떤다. 평소보다 높은 톤의 목소리와 환한 표정으로 어떻게든 긴장을 녹여보려 애쓴다. 물론 대체로 실패한다. 소극적인 사람이 떠는 너스레의 효과란 미미할 수밖에 없는 데다, 이미 오늘의 주인공은 저편에 서 있는 카메라의 존재감에 압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 없다고 생각하시고 평소처럼 해주시면 돼요, 편안하게요”라는 말을 반복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잘 안다. 저렇게 떡하니 카메라가 자리하고 있는데, 어떻게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카메라 뒤에 서 있는 나조차도 인터뷰 촬영 때면 염소 같은 목소리로 더듬대며 질문을 던진다. 내 목소리가 실시간으로 녹음되고 있다는 게 긴장되고 떨려서. 저 새카만 카메라의 힘이란 게 그토록 세다.

별수 없이 나의 주인공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꾸만 서툴러진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개그맨 못지않은 입담으로 스태프들을 웃기던 분이 카메라가 켜지자마자 로봇처럼 어색해진다거나, “카메라는 없다고 생각하시고요, 저 보시면 돼요, 렌즈 쳐다보시면 안돼요”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까지 들어 올리던 분이 큐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5초에 한번씩 렌즈와 눈을 마주치며 껌뻑인다. 그럴 때면 나는 카메라에 투명망토를 씌우는 상상을 한다. ‘너 없을 땐 내 주인공이 얼마나 재밌고, 멋있고, 따뜻했는지 알아?’ 외치면서.

카메라 앞에서 애쓰고 있는 평범한 주인공을 볼 때면 얼마쯤 그에게 빚진 심정이 된다. 방송이 다 뭐라고, 이 분은 긴장과 불편을 참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주려 애쓰고 있는 걸까.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직업도 아니고, 우리가 많은 출연료와 보상을 드리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얼마나 방송을 잘 만들어야 이 빚을 갚을 수 있을까….

그런 마음으로 촬영을 마친 뒤 홀로 편집실로 돌아오면,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보물찾기 시간이다. 촬영한 장면들을 하나씩 찬찬히 살피며, 더듬대는 말과 어색한 움직임 사이에 빛처럼 스쳐 가는 찰나를 발견하는 게 내 일이다.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는 한마디, 멀리서 찍힌 자연스러운 웃음, 어색한 표정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반짝이는 눈빛 같은 것들. 거리에서 한번쯤 스쳐 지나갔을 법한 보통의 이웃들이 평범하지만 고유한 주인공이 되는 순간.

누군가의 얼굴과 삶에 녹아있는 빛을 찾으며, 그 빛에 빚지며 방송을 만든다. 내가 발견한 이 빛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최대한 많이 가닿는 걸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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