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서 당했다" 살인범 몰려 10년 옥살이한 사연[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2023. 9. 10.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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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넥트 픽쳐스 제공]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저는 천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악마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겉으로 보기에 어땠든 간에 살인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는 건 부당해요. 변명의 여지가 없죠."

1973년 6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거리 한복판에서 한 중국인 남성이 총격을 맞고 사망합니다.

5일 뒤, 한국인 철수 리가 살인죄로 체포됩니다. 그의 21번째 생일 직전이었죠.

그는 직장 매니저가 빌려준 총을 집에서 만지다가 실수로 벽을 쐈습니다. 그 총과 범행에 쓰인 총이 같다는 것이 체포 이유였습니다. 체포 당시 그의 집에선 실탄 41발과 357 매그넘도 발견됐죠.

절도 혐의로 보호 관찰도 받고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폭력 사건엔 연루된 적 없는 조용한 청년이었습니다. 그저 어머니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 밖을 나도는 외로운 청년이었죠. 무엇보다 용의자는 중국인이었습니다.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백인 목격자들의 착오가 철수를 살인범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한국인이고 중국인은 중국인이죠. 그땐 단순한 오해 같은 거니까 시간이 가면 풀릴 줄 알았어요."

목격자들로부터 살인범으로 지목 받았던 당시 철수 리(5번) [커넥트 픽쳐스 제공]

큰 착각이었습니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악명 높은 교도소에 수감됐죠. 누구는 운동하다 살해 당하고, 누구는 칼침을 24번 맞아 죽는 그런 교도소였습니다.

철수의 소식을 들은 일본인 친구 랑코 야마다는 철수를 도와줄 변호사를 수소문했지만 모두 돈 문제로 사건 맡기를 거부했습니다.

"너무나 부당해요. 전 그런 사건을 맡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 뿐이었어요."

무죄 확신한 기자의 노력…살인 또 벌어진 교도소
이경원 기자와 철수 리[커넥트 픽쳐스 제공]

그가 수감된 지 4년 후인 1977년, 우연히 철수의 사연을 들은 현지 신문사의 이경원 기자가 취재에 나섰습니다. 사건 내막을 알아본 그는 철수의 무죄를 확신했죠.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다 생김새가 비슷하잖아요. 이 모든 게 도와주거나 힘써줄 사람이 없는 거리의 한 소년을 몰아 세운 겁니다. 철저히 혼자였으니까요."

그는 이 사건을 단순히 한 청년의 억울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종 차별이 흔한 미국사회에서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제가 철수와 같은 운명을 피하게 된 건 순전히 신의 은총이에요. 철수와 저는 솔직히 큰 차이가 없거든요. 저는 운이 좋았고 철수는 철수는 운이 나빴죠. 운 나쁜 사람이 너무 많아요 특히 아시안인은요. 언론, 법 집행기관, 사법체계도 무지하고 무신경했어요. 그렇게 때문에 저는 이게 내 소명이구나 싶었어요. 무지함과 무신경함의 벽에 작은 흠집이라도 내는 걸요."

그러던 어느 날 철수는 교도소에서 다른 수감자의 공격을 받습니다. 교도소 내에서 백인 우월주의 갱과 멕시코 갱이 대립 중이었는데 백인 갱이 양쪽과 잘 지내던 철수를 탐탁치 않게 여긴 거죠. 생존에 위협을 느낀 철수는 정당방위로 백인이 갖고 있던 칼로 그를 찔렀습니다. 안타깝게도 백인은 숨졌죠. 결국 철수는 1급 살인으로 기소됐습니다.

"전율이 일었어요. 그때까진 저와 싸운 사람이 죽은 것도 몰랐거든요."

"인종차별 뿌리 뽑자"…전국 퍼져 나간 '철수 리 구명 운동'
[커넥트 픽쳐스 제공]
철수 리 구명 운동 벌이는 랑코(중앙)와 사람들[커넥트 픽쳐스 제공]

철수의 억울한 사연이 전해지자 랑코, 이경원 기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철수 리 구명위원회를 꾸렸습니다. 한국 교민 사회가 구심점됐는데, 이 가운데엔 유재건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곳곳에서 모금 운동을 벌이며 그의 억울한 사연을 널리 알렸습니다. 청바지와 한복 저고리를 입은 수백여 명이 연일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스스로 몇 번이나 되뇌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토록 날 풀어주자고 열심일까? 그 점이 믿기 어려웠어요. 전 한 명의 죄수일 뿐이고, 그런 일은 생전 처음이었어요. 그들의 성원을 인간적 차원에서 깊이 느꼈어요. 수년이 지나서도 이 사람들 눈에 제가 얼마나 뜻깊은 존재였는지 충분히 이해하질 못한 것 같아요. 저는 대의명분이나 상징이 된 것이죠."

철수는 그를 돕는 교민 사회에 큰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내적인 우울감에 시달렸습니다.

"죄수한테도 자존심과 인간성이 있을 테지만 그걸 온전히 지켜내긴 힘들어요. 점점 교도소에 익숙해지고 변해 가면서 생존의 필요성이 행동을 좌우하게 되니까요. 지지자 분들에게 이런 감정은 말 못 했어요. 이 운동에 담긴 선의가 보이는데 거기 먹구름을 드리우긴 싫었죠."

핵심 목격자 찾았다…판도 뒤바뀐 재판
[커넥트 픽쳐스 제공]

구명위원회의 적극적인 노력 끝에 사건의 결정적인 목격자를 찾았습니다. 범인을 3.6m 거리에서 본 행인이었죠. 이를 계기로 법원은 재심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검찰이 항고하면서 그의 수감 생활은 계속 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교도소 살인 사건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사형수만 수감되는 교도소로 향했죠.

"무엇보다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됐다니 믿기 어렵습니다. 살면서도 하루하루 죽어가는 기분이에요. 가난하면 혼자서 정의로운 대접을 받기 어렵죠. 권리를 주장하고 확보하는 걸 도와줄 이들이 필요하죠."

그는 재심이 실제로 열리기까지 3년간 사형수로 지내야 했습니다. 사형수 교도소엔 우울함만 가득해 수감자 2명이 실제로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희망과 삶의 의지가 사라진 그 곳에서 버티고 버텼습니다.

"사형 당하기 전에 스스로 자살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란 거 깨달았어요. 혼자 우울의 나락에 떨어지게 만들어서 자살하게 함으로써 시간과 수고를 더는 거에요. 모든 사형수는 자살을 고려합니다. 하지만 저는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이런 어두운 면을 보이지 않았죠."

[커넥트 픽쳐스 제공]

수감 9년째인 1982년. 본격적으로 열린 재심에서 랑코까지 합류한 변호인단은 경찰 수사의 허점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그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새로운 목격자의 증언의 힘도 컸죠. 그리고 배심원단은 그에게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을 내렸습니다. 재심 청구에 뛰어든 지 5년 만이었습니다.

"여태까지 그들 중 누구도 부당하게 수감한 걸 인정하지 않았어요. 경찰도, 검사도요. 이 상황에 제가 조금이나마 정의를 느끼려면 저를 교도소에 넣은 이들이 잘못을 인정해야 해요."

교도소 살인 사건의 2심도 원심 파기로 나오면서 그는 사형수란 딱지를 뗐습니다. 보석금만 내면 나갈 수 있었죠. 그런데 그 보석금만 25만달러. 유 변호사가 집을 담보로 맡긴 덕에 그는 1983년 3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10년 만에 자유의 몸…현실은 달랐다
10년 만에 출소한 철수 리[커넥트 픽쳐스 제공]

10년 만에 나온 자유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온 마음으로 환영했습니다.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그는 어느 새 아시아계 연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돼있었습니다. 전국 투어를 다니며 대대적인 축하 세례와 환대를 받았죠. 석방 5개월 뒤 교도소 살인 사건도 잘 마무리됐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버거웠습니다. 한국인 멀티서비스센터, 컴퓨터 판매직, 건물 관리직 등 다양한 일자리를 시도해봤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기 일쑤였죠.

"너무 외로웠어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은 참 즐거웠지만 모임이 끝나면 감옥에서처럼 다시 혼자였어요. 감옥에서 나오면 제가 평범하게 잘 살아갈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실제론 힘들었어요. 10년을 교도소에 있었고, 그 중 4년은 사형수였죠. 그러다 사회에 나와서 평범하게 지내기는 어려웠어요."

그렇게 외로움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마약과 술에 손대기 시작합니다. 코카인에 중독된 철수는 한때 그를 도왔던 이들을 찾아가 마약 살 돈을 달라고 행패까지 부리죠. 결국 그는 마약 소지 혐의로 18개월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코카인을 하기 시작해서 때로는 하루에 7g, 14g씩 피웠어요. 그러면서 누구라도 정상적으로 살 수가 없죠. 제 몸이 그 많은 마약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어요. 상태가 점점 나빠져서 다시 거리로 나앉았어요."

다시 사회로 나왔지만 반기는 이는 차이나타운 갱들 뿐. 이들과 어울리다 또 사건에 연루됩니다. 갱단으로부터 누군가의 집을 방화하라는 지시를 받고 불을 질렀는데, 그 과정에서 얼굴을 포함한 온 몸에 큰 화상을 입은 겁니다. 그때서야 그는 방황을 멈췄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후회돼요.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줬어요. 그들을 실망시키고 그분들 이름에 먹칠을 했어요."

철수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설에 나서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여생을 보냈습니다.

[커넥트 픽쳐스 제공]

이 이야기는 10월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프리 철수 리'입니다.

영화는 미국에서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이민자 철수 리와 그를 구명하기 위해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영화는 철수의 기구한 삶을 다루는 동시에 재미 교포들이 겪었던 인종차별의 분노도 묵직하게 전달합니다.

누군가는 그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절도죄도 저질렀고, 갱들과 어울리니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교도소 나와서도 마약하고 갱들과 함께 지낸 거 보면 원래 그랬던 사람 같다고.

조금만 더 그의 삶을 들여다 볼까요?

[커넥트 픽쳐스 제공]

그는 6·25 전쟁 당시 성폭행을 당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원치 않았던 아이였겠죠. 이후 미군과 결혼한 어머니는 그를 두고 미국으로 떠났고, 철수는 외삼촌네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찾아와 그를 미국으로 데려가면서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머니로부터 맞았습니다. 겁에 질린 그는 거리로 뛰쳐나왔죠. 가족 하나 없고 돈 없는 그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곳은 차이나타운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억울한 살인범이 된 겁니다. 그리고 10년 간 인간의 존엄성이 빼앗겼습니다.

당시 그는 교민 사회에 억눌려 있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와 맞물리면서 아시아계 연대와 사법 정의의 상징이 됐습니다. 덕분에 그의 억울함도 풀렸지만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유명인사가 됐죠. 내성적인 그가 이를 받아들이기엔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조건 없이 뛰어들었던 구명 운동, 그리고 만인의 기대와 달리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던 그 사람. 너무나 감동적이면서도 너무나 먹먹하고 슬픈 현실 이야기입니다.

철수는 사회 활동에 전념하던 도중 위장 질환 수술을 거부하다 결국 201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50살 무렵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태어난 날부터 제 인생을 돌아보면 결코 원하지 않았던 엄청난 고통을 겪어온 한 사람이 보일 겁니다. 그런데 이경원 기자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분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타인의 깊은 고통으로부터 인류애가 자라난 거죠. 무조건적인, 순수한 인류애를 경험했습니다."

re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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