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5년 국가 경사때 꺼냅시다”…국회 해태상 밑에 숨겨진 ‘이것’ [김기정의 와인클럽]
신문사는 ‘취재처’ 구분이 확실한 편입니다. 정치부 기자는 ‘정치’기사를, 사회부 기자는 ‘사회’기사를 씁니다. ‘와인’과 관련한 기사는 매일경제신문처럼 경제지는 유통부의 식품담당 기자가, 조·중·동 같은 종합지는 산업부의 유통담당 기자들이 씁니다. 문화부의 식품 담당 기자들이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치부 기자들이 와인기사를 쓸 때가 있었습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해태상 밑에서 숙성 중인 와인과 관련한 기사입니다. 국회를 여의도에서 세종시로 옮기는 문제를 놓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설립과 관련한 취재를 하다 보면 ‘해태상’이 나오고 그 밑에 묻은 ‘와인’에 대한 얘기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최근에도 국회이전과 관련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지난달 30일 국회 세종의사당의 설치 및 운영 등에 관한 규칙안이 국회 운영위원회를 통과했습니다. 안은 18개 국회 상임위 중 12개를 세종의사당으로 이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상 서울 국회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것이란 평가도 나옵니다. 세종의사당의 완공 목표연도는 2028년입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해태상 밑에 묻혀 있는 와인의 오해와 진실을 살펴봅니다.
1975년 박정희 정부 때 일입니다. 9대 국회가 서울 중구 태평로에서 여의도로 이사를 갑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을 앞두고 해태상을 세우자는 의견이 나옵니다. ‘해태’는 화기를 억누르는 상징입니다.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된 이후 복원공사 때 해태상을 세웠습니다. 국회의사당에도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해태를 세우자는 의견이 나옵니다.
문제는 예산이었습니다. 이때 ‘해태산업’이 등장합니다. 해태산업 창업주 박병규는 일제강점기 나카오키 제과의 경리 사원이었습니다. 해방과 함께 남영동의 나카오키 생산설비를 불하받아 1945년 ‘해태제과합명회사’라는 이름으로 창업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부터는 승승장구. 홈런볼, 맛동산, 에이스, 부라보콘으로 유명한 해태제과는 롯데제과와 양강구도를 이뤘고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로도 유명했습니다. 1996년 말엔 재계순위 24위까지 오릅니다.
하지만 해태는 무리한 확장 탓에 1997년 외환위기로 유동성 위기에 몰립니다. 결국 2000년 주력 계열사 해태제과가 부도났고 그룹이 해체되면서 2005년 크라운제과에 인수됩니다. 이어 2020년 빙과류사업은 빙그레가 인수합니다.
다시 1975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해 해태는 창립 30주년을 맞았습니다. 해태는 회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해태상을 만들어 국회의사당 앞에 기증합니다. 당시 돈 3000만원이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해태상 밑에 계열사였던 해태주조가 만든 ‘노블와인’ 백포도주 72병을 양쪽에 36병씩 나눠 묻습니다. 100년 뒤인 2075년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건배주로 사용하자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1976년 나온 해태30년사에는 “땅을 파고, 그 안을 석회로 봉했다. 특별 제조한 항아리에 백포도주를 한 병 한 병씩 석회로 감싸 항아리 안에 넣었다. 개봉일은 100년 후로 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해태 노블와인이 ‘최초’의 한국 와인인지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국 와인생산 업계에서는 한국 와인의 시초를 1969년 출시된 ‘파라다이스’로 보고 있습니다. 사과로 만들어 엄밀한 의미의 와인은 아닙니다. 해외에선 포도로 만든 것을 와인이라고 부릅니다. 나머지는 과실주입니다. 한국 와인은 포도 외에도 각종 과일로 만든 과실주까지 포함해 넓은 의미로 와인이란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사과 뿐 아니라 복숭아, 머루, 감, 딸기 등 다양한 국내 생산 과일로 와인을 만듭니다. 포도냐 아니냐보다도 한국 땅에서 자란 과일을 사용했는지가 ‘한국 와인’의 기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와인 브랜드인 마주앙은 이보다 3년 늦은 1977년에 출시됩니다. 당시 외래어를 쓰지 못하도록 한 시책에 따라 ‘마주앉아 즐기는 술’이란 의미에서 마주앙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일반 소비자에 공급되는 마주앙은 해외 와인을 병입한 것으로 한국 와인으로 부르기도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국내 천주교 미사용으로 쓰이는 마주앙이 국산 포도로 만들어지고 있어 한국 와인의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화이트 와인이 레드와인보다 더 귀한 술이었다고 합니다.
화이트 와인은 포도의 껍질을 벗기고 포도즙만으로 만듭니다. 레드 와인은 포도 껍질을 같이 넣어 발효시킵니다. 당연히 레드 와인에 포도껍질 등 부유물질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양조법이 많이 발달해 레드 와인의 부유 물질을 깔끔하게 제거하지만 과거에는 껍질과 씨가 와인과 함께 떠다니니 레드와인은 하층민 또는 노예의 술이었다고 합니다.
해태가 ‘노블와인’을 만들 때만 해도 한국의 양조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레드 보다 화이트가 더 비쌀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화이트는 프랑스에서 들여온 주조용 포도품종을 재배해 사용했고, 레드는 일반 식용 포도를 사용해 포도 원가에서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으로는 레드 와인이 화이트 와인보다 비쌉니다. 최근 들어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화이트 와인의 소비량이 늘어나면서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의 가격차가 좁혀질 수도 있어 보입니다.
이 역시 해태 노블와인 광고 문구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 보르도 뿐 아니라 샹파뉴, 알자스, 남부 론 등 다양한 지역에서 와인이 생산됩니다. 먼저 부르고뉴에선 피노 누아 단일 포도 품종으로 맛있는 레드 와인을 만듭니다. 또 ‘화이트 버건디’라고 불리는 맛있는 화인트 와인이 생산됩니다. 버건디는 부르고뉴의 영어식 발음입니다. 화이트 버건디는 샤르도네 단일 포도품종으로 만드는 데 부르고뉴의 레드 와인만큼이나 유명합니다.
하지만 보르도는 레드와인이 압도적입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말벡, 프티 베르도가 5대 보르도 지역 레드 포도 품종입니다. 보통 보르도 방식이라고 하면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로하는 좌안(Left Bank) 방식과, 메를로를 주로 하는 우안(Right Bank) 방식으로 나뉩니다. 보통 보르도 블렌딩이란 표현을 많이 씁니다.
물론 보르도 지역도 화이트 와인을 만듭니다. 보르도의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은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입니다. 또 다른 화이트 와인 포도 품종인 세미용은 소비뇽 블랑과 섞어 아주 맛있는 디저트 와인을 생산해 냅니다. 소테른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스위트 와인 샤토 디켐이 세미용과 소비뇽 블랑을 섞어 만든 와인입니다.
해태의 화이트 노블와인은 ‘시벨9110’이라는 포도품종을 사용했다고 병에 표기돼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재배된 포도품종으로 와인 주조용 뿐 아니라 식용포도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와인용으로 품질이 좋지 않아 지금은 프랑스에선 거의 재배되지 않고 있습니다. 베르데레(Verdelet) 포도품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 병, 한 병을 석회로 감싸서 괜찮을 것이란 의견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1975년에 묻어둔 노블와인은 50년 가까이 묻혀 있었으니 이미 식초로 변해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맛이 좋은 와인으로 바뀌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최근 열린 프랑스 알자스 와인 마스터 클래스에서 연사로 나선 티에리 프리츠씨는 “화이트 와인 포도품종인 리슬링으로 만든 1865년산 알자스 와인을 마셔봤는데 식초로 변하지 않고 맛이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100년 숙성된 와인이니 가격도 비쌀 것’이란 의견도 있습니다. 사실 와인 자체로만 보면 100년을 숙성시켜서 마셔야 할 와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가격’으로만 따질 일인가 싶습니다. 100년 뒤인 2075년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건배주로 사용하고자 했던 기증자의 의견을 존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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