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여성 최초 부커상 작가 에바리스토 방한…붕괴와 재건을 말하다

임인택 2023. 9. 1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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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진은영과 대담
‘2023 서울국제작가축제’가 열린 9일 서울 노들섬 다목적홀에서 영국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가운데)와 시인 진은영(사진 왼쪽)이 대담하고 있다. 이날 사회는 송종원 서울예대 교수가 맡았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20대 때 페미니스트 활동을 했고, 흑인 여성극단을 운영했습니다. 힘없는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는데 당시 만났던 20살 연상의 여성이 날 지배하려 했어요. 난 강인한 여성이라 생각했는데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었고, 이렇게 붕괴될 수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어요. 스스로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흑인 여성 최초로 영국 부커상(2019)을 받은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64)가 처음 방한해 한국 독자와 만났다. ‘2023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초청, 지난 9일 오후 서울 노들섬 다목적홀에서 진행된 시인 진은영(53)과의 대담을 통해서다.

에바리스토가 돌연 고백한 ‘붕괴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홀을 꽉 채운 120명 청중들은 자주 웃어야 했다. 작가가 보여준 생동력과 희망 덕분이다.

부커상 수상작으로, 19살부터 93살까지 열두 명의 다양한 흑인 여성 주인공들을 중층시켜 영국 흑인 여성의 비가시화된 삶을 관통한 장편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비채, 2020)로 대변되듯, 영국의 페미니스트 운동가이자 작가로 에바리스토가 남겨온 자취는 두드러진다. 차별과 저항, 붕괴와 재건의 증거로, 영국 최초 흑인여성 극단 설립 운영, 최초의 흑인 왕립문학협회 회장 역임 등은 일례에 불과하다.

‘붕괴’의 위협은 그럼에도 거듭된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붕괴에 임박한 것들이 많아요. 미국에서 50년간 진보했다고 생각했지만 ‘낙태금지법’과 같은 붕괴적 현상을 목도하고요. 난 영국인이지만 미국에서의 일들이 전세계에 경종을 울립니다. 트럼프(전 대통령)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상황들이죠. 인종, 여성차별과 같이 우리 사회에서도 발견할 많은 것들을 작가로서 탐구하고 싶습니다. 기존 ‘노멀’로 간주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는 게 중요합니다. 긍정적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요.”

에바리스토는 ‘아프리칸 디아스포라’다. 아버지가 나이지리아계로 1949년 영국으로 이주했다. 10년 뒤 런던에서 자신이 태어났다. 10대 초반 연극 활동을 시작했고, 로즈 브루포드 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19살 연기 수업을 받으며 창작도 시작했는데 사회 불의를 자주 경험했어요. 자전적 소설을 많이 썼는데 특히 20대 땐 눈물 나는, 감동 가득한 작품을 쓰고 싶었습니다, 진지했지요. 밤새 술에 취해 시를 쓰기도 했어요, 절대 추천하진 않지만요. (좌중 웃음) 34살 첫 시집을 출간하면서 유머를 담을 수 있었어요. 해학적 면모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지하는 제 스타일이 됐습니다.”

런던 브루넬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그는 “휴대폰과 인터넷에 빨려 들어가며 대면과 진정한 교감이 줄어드는 세태를 전세계가 더 살피고 젊은이들이 균형적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에스앤에스(SNS) 활동을 피하지 않는다. 세대 간극을 줄이기 위함이다. 과거보다 이해를 더 심화해가며 더 먼 노년 세대까지 작품에서 적극 형상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날 대담 주제는 ‘붕괴된 삶의 자리에서’였다. 10년 만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문학과지성사)를 지난해 펴낸 시인 진은영이 마주한 자리였다.

“세월호 참사 당시 한동안 작품을 못 썼어요. 명료한 언어로 고통을 전달하는 데 난 익숙지 않았던 시인입니다. 그런데 명료히 그걸 전해야하는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시 쓰던 방식과 다르게 4번째 시집이 쓰였고 삶도 바뀌었어요. 다른 이들의 붕괴하는 삶을 강제적으로 직면해야 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진은영이 ‘슬픔’ 곁에 맨 나중까지 누워 직시하는 자라면, 에바리스토는 ‘슬픔’을 맨 먼저 일으켜 말하는 자다. 목적이 다르지 않다.

“내외부 갈등과 난관이 있어요. 그 상황에서 완전히 붕괴되는 캐릭터엔 흥미가 없어요. 회복력을 갖고, 이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살아남겠구나, 그런 희망을 갖게 하고 싶어요.”(에바리스토)

“최근 붕괴되지 말아야 할 삶의 자리가 굉장히 넓어지고 있어요. 한편으로 어떤 붕괴는 인생을 바꾸기도 하지요. 어떤 정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붕괴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면 정상성에 갇히잖아요. 붕괴의 용기가 필요한 마음으로 시를 썼어요.”(진은영)

시인 진은영(왼쪽)과 영국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가 대담 뒤 1시간여 동안 작가사인회를 진행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2023 서울국제작가축제’가 열린 9일 서울 노들섬 다목적홀에서 영국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가운데)와 시인 진은영(왼쪽)이 대담하고 있다. 송종원 서울예대 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축제는 13일 폐막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시인은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의 한 구절을 들췄다. 작품 속, 유색인 여성들을 무대 주인공으로 삼겠다는 극단의 각오였다.

“우리 방식대로 한다/ 그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소설엔 마침표가 드물다. 에바리스토는 뚫어져라 시인을 바라봤고 “우리만의 지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국제작가축제는 13일까지 열린다.

글·사진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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