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혼자 쓰는 밧줄 아닌…함께 지탱하는 그물

한겨레 2023. 9. 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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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남창훈의 생명의 창으로 바라본 사회][한겨레S] 남창훈의 생명의 창으로 바라본 사회
우생학과 능력주의
계산·추론 등 학업역량 줄세우니
경청·화해·통찰 능력 등은 고사
유기성·다양성 ‘생명 원리’ 위배
공감능력 부족한 엘리트 양산
극단적 선택을 한 서울 초등학교 선생님의 49재를 맞아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공교육 멈춤의 날’ 행사 시작에 앞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세상사는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현실 속 사건은 제법 복잡하고 입체적이어서 어디서 어떤 각도로 살펴보는지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 이 연재에선 생명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무리 따져봐도 모든 관점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기본은 ‘생명’이라는 생각에서다. 모든 인간의 시작과 끝에 놓인 것이 생명이다. 생명은 가장 공평한 것이고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것이다. 온갖 치장을 다 지우고 마지막 남는 것이 생명이다. 온갖 잇속과 특권으로 갈라치고 나누고 분열시키고 고립시켜 놓아도 맨살 아래 비치는 핏줄처럼 서로 얽힌 채 쉼 없이 순환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생명이라는 돋보기와 창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겠다는 열망이 생긴 동기는 가혹하고 슬픈 현실과 맞닿아 있다. 지난 18년간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이며 최근 10·20대의 자살률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22년 통계에서 우리나라 아동·청소년의 삶 만족도가 오이시디 최하위를 기록한 건 당연한 귀결이다. 최근 이어지는 비보에서 알 수 있듯 학교 현장에 있는 선생님들의 절망도 임계치에 이르고 있다. 합계 출산율 0.78명은 내 자식을 이러한 사회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고뇌 어린 결정의 산물이다. 우리는 지금 생명을 대하고 다루고 이어가는 기본 과정들에 생긴 깊은 균열에 직면해 있다.

지배구조 유지 방식 ‘우열 가르기’

처음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는 ‘우생학과 능력주의’다. 우생학과 능력주의는 얼핏 서로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속내를 들여다보면 공통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우생학은 특정 유전자를 사회적 덕목과 일치시키고 그 기준에 따라 유전적 차이를 우열의 관계로 바라본다. 열등한 형질은 도태되거나 기피돼야 할 것으로 치부하고, 유전적 다양성과 배치되는 길을 간다. 주류 사회의 가치관에 유전자를 투영시켜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우열에 기반한 차별을 정당화한다. 능력주의는 주어진 주류 사회 구조에 맞춰 거기에 요구되는 능력을 선별하고 그 능력의 고저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보상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다. 사회의 위계는 능력의 위계와 서로 연결돼 있다. 예를 들어 병원 안에서 의사와 간병인의 위계는 직능(능력)의 차이 때문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우생학에서는 다양한 유전형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형질의 서열이 매겨지고, 능력주의에서는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능력들의 서열이 매겨진다. 그 서열이 매겨지는 원천은 모두 사회 지배 구조에 있다. 따라서 우생학이나 능력주의 모두 사회 지배 구조에 흐르는 질서를 정당화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우생학 하면 나치를 떠올리고 이젠 한물간 학문으로 여기기 쉽지만, 사실 그 변종을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장애나 지능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첨단 생명공학으로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증강’을 설계할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생학의 변주를 접하게 된다.

우생학의 철학에 동의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유기성과 다양성이라는 생명 원리에 반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 생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각 생명 개체는 서로 연결됨으로써만 존재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연결을 타고 흐르며, 그 흐름에 따라 생명체는 생로병사의 순환을 하게 된다. 모든 개체는 그렇게 접속된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의미를 실현시킨다. 그리고 접속에 참여한 모든 개체는 각기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생명의 유기성과 다양성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그것은 계몽의 소재가 아니고 생명계가 지속해서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인간의 능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 생명을 좀 더 나은 조건에서 존속시키고자 애쓴 노력의 산물이다. 그렇다 보니 능력의 속성은 다양성과 유기성이라는 생명의 속성과 깊이 맞닿아 있다. 그런데 능력주의는 사회 주류 체계가 요구하는 선별된 능력에 배타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능력주의는 정작 사회에 요구되는 다양한 능력들을 사람들로부터 고사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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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의 치명적 부산물

능력주의가 뼛속 깊이 스며든 우리 학교가 그러하다. 첨예한 경쟁에서의 승리가 덕목이 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능력을 길러 경쟁에서 이기고 더 나은 보상을 얻고자 총력을 기울인다. 이런 사회에서 학교는 무한경쟁을 위한 역량을 기르는 곳으로 자리매김된다. 학교에서 기른 개인화한 역량은 지능에 기반해 학업 성취를 이루는 학업 역량에 집중된다.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하고, 문맥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추론하며, 지식과 정보를 수용하고 응용하는 역량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능력들은 학업과 전문적 직능의 개발을 위해 소중하다. 문제는 이런 역량이 지나치게 과잉 대표되고 상찬되고 보상될 때 일어난다. 특정 능력에 대한 과잉된 가치 부여는 사회적 보상체계의 균형을 깨뜨리고, 더 나아가 가치체계를 기형적인 모습으로 왜곡시킨다. 그 결과 능력의 다양성과 유기성은 급격히 사라진다.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능력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퇴출되고 갈수록 희소해진다. △타인에 대해 공감하고 △타인이 공감할 수 있게 자신을 표현하며 △생물을 기르고 가꾸고 △다양한 감각으로 느끼고 상상하며 △묻고 답하고 △경청하고 △위로하고 △화해도 시키고 △자신의 오류와 한계를 통찰하고 인정하는 능력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은 경험을 통해 연마돼야 하지만 좀처럼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면서 학교에서 성장의 계기를 갖지 못한 채 소실되고 있다. 고도의 학업 역량을 갖춘 우리 사회 엘리트들이 보이는 공감·소통 능력의 부족은 능력주의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가장 치명적인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능력은 밧줄이 아니라 그물이다. 얽히고설켜 서로를 지탱함으로써 살아남게 되는 생명처럼 다양한 능력은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간다. 그러면서 개인은 전인적 능력을 갖추고, 사회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들로 채워질 것이다. 비로소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낳고, 태어난 아이들은 보고 싶은 동무를 기대하며 아침잠을 깨는 그런 사회. 2023년 9월4일, 거리에서 눈물 흘리신 선생님들이 꿈꾸는 학교도 여기서 멀지 않을 것이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

서울대와 프랑스 퀴리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 분자생물학연구소에서 생화학·면역학 등을 공부했다.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수용체 개발, 노화와 면역 사이의 연관 등을 연구하면서 대학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부단히 모색 중이다. ‘탐구한다는 것’, ‘이타주의자’, ‘소년소녀, 과학하라!’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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