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희진, '靜中動 미학' 빚다…여유롭게 경유할 근거 '슬로 댄스'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글로벌 슈퍼 그룹 '방탄소년단'(BTS) 뷔(V·김태형)가 최근 발매한 첫 솔로 앨범 '레이오버(Layover)'의 열쇳말은 느림이다.
이 열쇠로 뷔가 만든 세계로 들어가면 마음이 부유한다.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K팝은 쾌속 열차를 탄듯 빠르게 변화하는데, 이 앨범은 뷔의 말마따나 그 속에서 서정적 풍경을 경유하는 느낌이 든다.
고즈넉한 곳에 오도카니 앉아 정갈한 햇빛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 뷔의 팝 R&B 장르는 세상의 고요한 것들을 참 담백하게 들려주는 여백의 미를 뽐낸다. 타이틀곡 '슬로 댄싱(Slow Dancing)'이 좋은 보기다. 3분8초짜리 곡에 1분50초부터 보컬 없이 연주만 넣는 대담함이 증거다. 밀도 높은 것이 미덕인 K팝에선 찾아보기 힘든 시도다. 원래 피아노 버전이 타이틀곡이었다가, 플루트 버전을 듣고 이 버전을 타이틀로 낙점했다고 했는데 잔향이 여유로움을 주는 플루트의 소리에 매료되다 보면 납득된다.
하지만 겉면의 평온함은 내면 속 분주함의 결과다. 뷔의 수없이 피었다 졌다 했을 마음의 소란이 만들어낸 꽃피움이다.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이다. 방탄소년단 멤버들과 함께 하는 무대 위 모습은 화려하지만 평소 뷔의 특질은 느림과 여유로움. 그렇다고 내면까지 침잠하는 것은 아닌, 그 안에는 무수한 고민이 지저귄다. 선공개곡이던 얼터너티브(Alternative) 팝 R&B '레이니 데이즈(Rainy Day)'의 일상 속 다양한 백색소음처럼.
누군가는 단점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뷔의 느린 특질을 미학으로 승화시키는데 도움을 준 것이 민희진 어도어(ADOR) 프로듀서다. 수많은 미적인 장치에도 음악이 제일 중요한 신드롬 걸그룹 '뉴진스'를 제작한 민 대표는 이번 뷔의 앨범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그녀답게 이번에도 뷔, 그와 어울리는 음악 본연에 집중했다.
뉴진스의 노래들을 작사·작곡한 프로듀서진이 대거 뷔에 음반 작업에 참여한 점이 그래서 흥미롭다. '쿠키'·'OMG'를 작업한 힙합 듀오 'XXX' 멤버인 DJ 겸 프로듀서 프랭크(FRNK·박진수), 뉴진스 '하이프 보이' '쿠키' 'ETA' 등에 힘을 보탠 지지(Gigi·김현지) 등이 뷔의 음반 작업에 함께 했다. 프랭크와 함께 XXX 김심야(김동현), 래퍼 마스타 우(Masta Wu) 등 레이블 비스츠앤네이티브스(BANA) 사단이 이번에도 힘을 보탰다. 민 프로듀서와 BANA는 뉴진스에 이어 뷔의 앨범에서도 시대의 유행을 적절히 타면서도 휘둘리지 않는 개성을 담는 근사한 합을 보여줬다.
뉴진스의 '슈퍼 샤이', '쿨 위드 유' 작업에 참여한 프랭키 스코카(Frankie Scoca)도 '레이니 데이즈' 등에 함께 했다. 이번 앨범에서 특히 주요한 역할을 한 프로듀싱팀은 듀오 '프리카인드.(freekind.)다. 이들은 뉴진스 '겟 업'에도 함께 했지만 이번 뷔의 '레이 오버'를 통해 사실상 K팝 신에 제대로 데뷔했다. 앨범에 실린 여섯 트랙(곡 수로 따지면 다섯 곡) 중 '블루'를 제외한 모든 곡에 관여하며 이번 앨범의 빈티지한 분위기에 주요한 역을 했다.
감각적인 미장센으로 유명한 민 프로듀서는 빈티지하고 아날로그적인 음악에도 관심이 많다. 뷔의 이번 음반은 그래서 뷔의 취향이자 민 프로듀서의 취향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취향의 합은 은밀하면서 고급스러운데, 그것이 티내지 않는 관능으로 수렴된다.
낡은 재즈 음반의 물리적 촉감을 청각으로 옮긴 '레이니 데이즈', 올드스쿨 R&B에 모던한 소리를 입힌 '블루(Blue)', 1970년대 솔을 기반 삼고 포근하면서 성스런 가스펠적 요소를 몽환적으로 더한 '러브 미 어게인(Love Me Again)', 팍팍한 삶의 가장 낭만적인 '서머 송'이라 칭할 수 있는 '슬로 댄스', 현대적·아날로그적 사운드가 화학적으로 결합된 '포 어스(For Us)' 등은 담백하면서 청빈한 포만감을 선사한다.
이처럼 뷔와 민 프로듀서는 K팝 신에 다른 구도(構圖)를 만들어낸다. 그동안 K팝 신에 부족했던 여백의 공간감을 지어내고, 여유롭게 경유할 근거를 마련한다. 그건 한정된 시간 안에서 찾아낸 시간의 다른 결이다. 곡의 러닝타임이 같은 3분이라도 이를 세 시간 아니 삼 일처럼 느끼게 하는 묘수. 구체적이고 꽉 찬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경유지를 만들어낸 게 뷔·민 프로듀서 합이 빚어낸 정거장이다.
여기에 이번 앨범 이미지가 뷔의 근사한 외모에 빚진 걸 부인할 수 없다. 콘셉트 포토를 무려 102장을 공개하고 뮤직비디오 역시 앨범에 실린 다섯 곡 모두 제작했는데 그건 뷔의 이미지적 힘이 없으면 힘든 결정이었다.
저음이 매력적인 뷔는 K팝 아이돌 중에서 가장 고전적 이미지를 지녔다. 1950년대 초 미국 관객들을 열광시킨 '재즈 크루너'(부드럽고 중후한 음색 스타일로 노래하는 가수)로서 잠재력도 갖고 있다. 지난달 중순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선 뷔가 좋아하는 미국 재즈 보컬 커트 엘링(Kurt Elling)이 미국 기타리스트 찰리 헌터(Charlie Hunter)와 함께 결성한 슈퍼 프로젝트 밴드 '수퍼 블루(Super Blue)' 멤버로 내한공연했다. 엘링은 신사다운 목소리로 찰랑거림을 표현했는데 뷔의 '오래된 미래'처럼 보였다.
한편, 이번 음반은 방탄소년단 멤버 중 마지막 솔로주자로 나선 뷔의 이름값을 확인해주고 있다. 국내 음반 판매량 집계 사이트 한터차트에 따르면, '레이오버'는 발매 첫날인 8일 당일에만 167만2138장이 팔려 곧바로 '밀리언셀러'가 됐다. '레이오버' 첫날 판매량은 K-팝 솔로 가수 음반으로는 발매 당일 역대 최다 판매량 신기록이다. '슬로 댄싱'은 9일 오전 7시까지 기준으로 전 세계 75개 국가/지역의 아이튠즈 '톱 송'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레이오버'는 전 세계 65개 국가/지역의 아이튠즈 '톱 앨범' 차트에서 정상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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