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전원생활에도 다 때가 있더군요”…60~75세가 즐길 수 있는 황금기[서영아의 100세 카페]
“춘천이 좋아 춘천에 정착했죠”… 다 갖춘 지방도시, 호젓함은 덤
집앞 텃밭 일구는 전원생활하며 지역 문화관광해설사로 맹활약
“전원생활 꿈꾼다면 서두르세요”
3년째 춘천시 소속 문화관광해설사로 활약하는 박의서(72) 씨는 당초 춘천과 연고가 없는 외지인이었다. 2018년 안양대 관광경영학과 교수에서 정년퇴직하면서 곧장 춘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18년간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전에는 한국관광공사에서 22년간 근무했으니 말 그대로 여행과 관광분야 전문가다. 지금은 시내 근교 주택에서 텃밭을 일구고 산다.
도시인들의 로망이기도 한 귀촌과 전원살이, 그 생생한 체험담을 들어보기 위해 지난달 31일 춘천을 찾았다.
“춘천은 우리 가족의 블랙홀이었다”
요즘 박 씨 가족은 두 딸 내외와 손주 4명까지 모두 10명이 춘천에서 산다. 세 집이 자동차로 5~10분 거리에 있다.
일가의 춘천 입성 계기는 2011년경 둘째 사위의 군복무였다. 입대 전 결혼해 아들을 둔 둘째 사위의 근무지가 춘천이었다. 부대 근처에서 살던 딸 내외는 제대 뒤에도 그냥 춘천에 눌러살기로 했다.
-명문대를 나온 젊은 부부에게 적당한 일자리가 있었나요.
“둘이 똑같이 미니멀리스트예요. 딱 먹고 살 만큼만 일하면서 농가주택을 빌려 개조해서 재미나게 살더군요. 처음에는 걱정도 하고 잔소리도 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현명했다’고 하게 되더군요.”
뒤늦게 결혼한 큰딸도 몇 번 와보고는 춘천이 좋다며 다 정리하고 내려와 버렸다. 지금은 큰 사위만 서울로 출근하는 생활을 한다. 전원생활과 귀촌은 박의서 씨의 로망이기도 했다. 정년과 동시에 서울 생활을 과감히 정리하고 딸들이 사는 곳, 춘천으로 옮겼다.
“춘천이 우리 일가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지요. 하하.”
“은퇴하고 귀촌해도 소일거리는 있어야 해요”
귀촌하면 그저 은퇴생활에 충실할 생각이었다. 춘천에 지연과 학연이 전혀 없다 보니 공부도 하고 사람도 사귈 겸 평생학습관이니 도서관 문화강좌 등을 열심히 다녔는데, 점차 지루함을 느끼게 됐다.
뭔가 소일거리가 필요했다. 하다못해 유치원 버스 운전이나 주유소 알바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고령 탓에 여의찮았다. 그러다 우연히 시청에서 문화관광해설사 모집이 있어 응모했다.
“은퇴하고 귀촌했어도 소일거리는 있어야 하겠더군요. 그때만 해도 ‘대학교수까지 하고 해설사 하려고 하냐’는 반응들이 있었어요. 영어특기자로 합격했지요.”
면접시험을 통과하고 집합교육 100시간, 현장 교육 100시간을 받은 뒤에야 자격증이 나왔다.
현재 전국에서 3000여 명이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중인데, 춘천시에는 20명이 있다. 소양강댐, 신숭겸 장군 묘역, 청평사 등 춘천의 주요 관광지 8개 지구에서 돌아가며 일한다.
한 사람이 한 달에 10~15일 정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고. 법적으로는 자원봉사지만 교통비 등의 명목으로 시간당 1만 원이 지급된다. 그의 경우 월 80~100만 원 정도 받는다.
춘천의 매력, ‘다 갖춰져 있는데 호젓하다’
그가 말하는 춘천의 장점은 끝이 없다. 산수가 좋고 교통이 편리한데 쾌적하고 없는 게 없이 다 갖춰져 있다는 것. 예컨대 서울까지는 ITX로 1시간 남짓, 전철로도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심지어 전철은 경로우대가 적용돼 무료다).
요즘 지방에서 성행하는 파크 골프를 즐기기에도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파크 골프는 클럽 하나로 치는 골프인데 골프보다 규모는 작지만 재미는 똑같고 비용이 들지 않는다. 세 바퀴 돌면 1만보 정도 걷게 되니 쏠쏠하게 운동도 된다. 춘천에는 지금 파크골프장이 두 군데 있는데, 3군데 더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월회비 몇만 원이면 매일 나갈 수 있어요. 함께 파크 골프 하는 의사들 말이, 요즘 노인들 건강관리의 수훈갑이 파크 골프라고 합니다.”
그의 경우 거의 매일 수영을 하는데 이용료 1500원에 국제규격 수영장이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아무 때나 가도 이용할 수 있다. 서울에서 레인별로 시간표 보며 예약해야 했던 것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하다.
이뿐인가. 노년의 전원생활에는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병원에서 멀다’는 지적도 통쾌하게 반박할 수 있다.
“집에서 15분 거리에 대학병원이 두 군데나 있어요. 제가 서울에서 빅5병원 바로 곁에 살았는데 응급실에 빨리 가면 뭐합니까. 기다려야 하는데. 여긴 기다릴 필요가 없죠. 노인들 살기에는 천국이에요.”
평생 ‘도시여자’였던 부인 신재희(67) 씨도 대만족이라고 한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굉장히 즐기고 있어요. 요즘은 파크 골프에 푹 빠져서 동호회 사람들과 매일같이 나가요. 여자들은 나이 들어도 새 친구를 잘 사귀더라구요. 남자들은 있던 친구도 정리하는 마당인데… 하하. 거기에 딸 둘 가까이에 살죠, 텃밭 일에도 재미를 붙여서…”
“전원생활 제대로 즐기려면 60대 초반에는 옮겨야”
“(아내가) 아침에 눈 뜨면 텃밭부터 나가는데, 농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요. 그걸 체감하곤 해요.”
“이렇게 이쁜 애들이 아침마다 절 부르는데 어떻게 안 나와 보나요”(신 씨).
박 씨는 농사일은 한해가 다르게 힘들어져 몇 년 더 지나면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그때는 어떻게 하실 계획인가요.
“저는 요양원에는 절대 가기 싫어요. 농사 못 짓더라도 여기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제가 경험해보니 전원생활을 꿈꾸는 분들은 적어도 60대 초반에는 옮겨야 15년 정도 전원생활을 누릴 수 있어요. 더 기력 있을 때,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서울에 준공을 앞둔 재건축 아파트를 가지고 있지만, 돌아가지 않게 될 것 같다.
“텃세? 없진 않지만 어디나 사람 사는 곳”
100세 카페에서 지방소멸이니 귀농 귀촌에 대한 기사를 쓰면 반드시 지방의 텃세 문제를 호소하는 댓글이 달린다. 이상적인 메시지는 귀농귀촌을 장려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부조리한 규제니 탁상행정, 지역사회의 따돌림 등으로 발길을 되돌리는 도시민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지요. 적당히 잘 지내는 경우는 괜찮아요. 그런데 이해관계가 얽히거나 외지인이 조금 튀는 행동을 하는 경우는 역풍을 만나요.
저는 관광 쪽을 오래 했으니 아무래도 지역 관광정책에 대해 의견이 있거든요. 지역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는데, 반응이 아주 차갑더군요. ‘춘천에 대해 당신이 뭘 안다고’ 이런 반응들이죠. 그래서 그냥 조용히 지내기로 했습니다.
제 눈에는 춘천이 가진 잠재력이 무척 큰데, 콘텐츠를 잘 만들어가면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데, 안타깝지요.”
이웃과의 관계도 어려움에 빠졌다. 이웃집이 도로부지를 남몰래 대지로 편입한 것을 뒤늦게 알고 항의했지만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이웃들과 사이가 불편해졌다.
“절차상 하자가 심각했는데 통하지 않더라구요. 지연 학연으로 얽힌 지역분들끼리 ‘좋은 게 좋은’ 식으로 하는 것은 사회에 좋지 않은 일입니다.
아내와는 ‘이럴 바에야 이사를 가 버리자’는 말도 했는데, 지금은 관계가 나쁘면 나쁜 대로, 신경 쓰지 말고 살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너무 좋으니까요. 불편하긴 하지요.”
주경야독으로 석박사 취득
조치원 인근 농가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는 장학금으로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언감생심.
“운 좋게도 미 8군에 배속돼 미군병원에서 일하게 됐어요. 의사들을 상대하다 보니 고급 영어를 배울 수 있었죠. 제가 평생 써먹은 영어는 여기서 배운 거였습니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운도 좋았어요”
제대 후 관광공사에 입사했을 때는 경기대 3학년에 편입한 상태. 석사는 미국 뉴욕지사에서 일하면서 야간대학에서 받았고 박사는 다시 경기대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땄다.
-늘 주경야독이었네요.
“제가 박사까지 받아 교수 생활도 했지만 솔직히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어요. 와중에 운은 좋은 편이었어요. 박사학위를 따자마자 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요.”
-운이 좋았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데, 부모 잘 만나 아무 걱정 없이 공부하고 유학 하러 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요.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운도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이 나이 되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그는 3년 전쯤 자신의 아호를 허당(虛堂)이라 지었다. 천자문의 ‘허당습청(虛堂習聽 빈방에서 소리를 내면 울려서 다 들린다는 뜻)’에서 따왔는데, ‘싹 비우고 새롭게 채워 넣겠다’는 각오를 담았다. 춘천으로 옮긴 직후 다니던 서예 교실에서 이 사자성어를 만났다. 그즈음부터 평생 잘못한 것에 대해 ‘거꾸로 쓰는 자서전’도 조금씩 쓰고 있다고 한다.
현역 시절에는 ‘기록 따라 떠나는 한국고전기행(2018) ’, ‘극한을 극복한 글로벌 고전 기행’ 등 인문서와 강단에서 아직도 사용되는 관광경영 관련 교재 등 10여 권을 냈다.
“제가 평생 웃는 얼굴로 살았는데, 나이 드니 이상하게 웃음기가 줄어요. 우아하게 늙는다는 게 물리적 심리적으로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분명한 건 살다가 머무는 곳이 고향이라면 이제 이곳이 제 고향이란 겁니다.”
춘천=서영아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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