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中 반도체 죽이기' 독 됐나…화웨이 5G폰 기습의 의미 [차이나는 중국]
스푸트니크 모멘트(Sputnik Moment)라는 말이 있다.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한 후 미국 전체가 경쟁자에게 뒤처지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미국이 과학기술에 돈을 쏟아붓게 된 사건을 뜻한다.
최근 똑같은 일이 중국에서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
2020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제재로 대만 TSMC가 중국 화웨이의 주문을 받지 않으면서 한때 세계 1위를 넘봤던 화웨이의 스마트폰 출하량은 약 2억대에서 3000만대 밑으로 급감했다. 이렇게 싹수를 잘려버리자 중국이 미국의 스푸트니크 모멘트에 맞먹을 만한 충격을 받고 거국적으로 반도체 산업 자급에 매진하면서, 이번에는 반도체 독자기술 개발에 성공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서방에서 나오는 것이다.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교수가 쓴 '칩 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에서 중국 기술 전문가인 댄 왕(Dan Wang) 가베칼 드레고노믹스 애널리스트가 한 말도 의미심장하다. 댄 왕은 미국 규제가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새로운 정책을 촉진함으로써 "기술 지배를 향한 베이징(중국)의 추구를 가속화했다"고 주장했다.
중국 반도체 산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자.
화웨이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의 방중기간에 맞춰 '메이트60 프로'를 내놓은 것도 중국에서는 화제다. 미국 상무부는 화웨이와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 SMIC를 수출통제명단(entity list)에 올리며 미국산 반도체 장비와 기술 수출 접근을 제한한 핵심 부서다.
테크인사이츠에 따르면 화웨이에 사용된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는 '기린(Kirin) 9000s'로 SMIC의 7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까지 화웨이는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설계한 AP를 대만 TSMC를 통해 생산해왔으며 퀄컴(미국), 미디어텍(대만)에 이어 점유율 16%로 글로벌 3위까지 상승했다. 하지만 2020년부터 미국의 제재 때문에 TSMC를 통한 생산이 불가능해지면서 점유율이 1% 미만으로 급락했다.
지난해 10월 미국 상무부는 △18나노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핀펫(FinFET) 기술을 사용한 16/14나노 이하 시스템 반도체 생산 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한다고 밝히면서 중국 반도체 고사에 나섰다. 중국의 D램·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산업과 파운드리를 모조리 틀어막기 위한 조치다.
이번 '기린 9000s'는 미국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자국 파운드리업체 SMIC의 7나노공정을 통해서 처음 만들어낸 AP라는 의미를 가진다. '기린 9000s'의 생산단가, 수율(양품률) 및 양산가능 여부도 중요하지만, '기린 9000s' 생산 자체가 중국이 반도체 자급 추진에서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는 걸 뜻한다.
SMIC는 올해 2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점유율 5.6%로 5위를 차지하면서 중국 파운드리업계의 희망 역할을 하고 있는 기업이다(대만 TSMC가 점유율 56.4%로 1위, 삼성전자가 11.7%로 2위를 차지했다). 하이실리콘 등 글로벌 선두수준인 중국 팹리스(반도체설계) 기업이 아무리 뛰어난 반도체를 설계해도 수탁생산을 해줄 기업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2020년 화웨이가 미국 제재로 TSMC를 통한 반도체 생산이 불가능해지면서 스마트폰 세계 1위를 향한 꿈을 포기한 게 좋은 예다.
지난해 SMIC는 1세대(N+1) 7나노 공정에서 비트코인 채굴칩을 생산했으며 이번에 2세대(N+2) 7나노 공정에서 '기린 9000s'를 생산하면서 중국의 반도체 자급 노력에 희망을 던졌다. 하지만 TSMC, 삼성전자 등 글로벌 선두기업과의 격차는 여전히 3~5년에 달한다. 애플이 지난 2018년 출시한 '아이폰 XS'에 탑재한 A12 바이오닉칩이 7나노 공정에서 생산됐으며 오는 12일 내놓을 아이폰15에 탑재되는 A17 바이오닉칩은 3나노 공정 기반이다.
한편 중국은 파운드리뿐 아니라 낸드플래시·D램 등 메모리반도체에서도 추격을 가속화하고 있다. 낸드플래시와 D램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기업은 양쯔메모리(YMTC)와 창신메모리(CXMT)다.
YMTC는 지난 6월부터 독자기술인 엑스태킹(Xtacking) 3.0 아키텍처를 이용해 개발한 232단 낸드플래시가 들어간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를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낸드플래시는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저장되는 메모리반도체로, 셀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데이터 용량을 늘리는 적층 기술이 경쟁력의 핵심 요소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글로벌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YMTC의 점유율은 약 3.9%로 알려졌다. 낸드플래시 시장은 삼성(34%), 일본 키옥시아(21.5%), SK하이닉스(15.3%), 미국 웨스턴디지털(15.2%), 미국 마이크론(10.3%) 등 5개사가 경쟁 중이며 YMTC가 시장에 신규 진입 중이다.
프랑스 시장조사업체 욜 디벨롭먼트(Yole Development)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낸드플래시 시장 규모는 587억달러에 달한다. 이중 약 33%(약 194억달러)가 중국 수요다. 중국이 YMTC를 통해서 자급률을 높여 나갈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지난해 글로벌 D램 시장 규모는 797억달러, 중국의 D램 수요는 약 30%(240억달러)를 차지했다.
D램에서도 중국은 2016년 5월 설립한 창신메모리(CXMT)를 통해서 국산화를 추진 중이다. 지난 2019년 창신메모리는 PC용 D램 범용제품(DDR4 8Gb)를 내놓은 뒤 2020년부터 양산에 진입했으며 2022년 베이징 생산공장, 허페이 공장을 건설하는 등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있다.
지난 8월 30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창신메모리는 SK하이닉스, 삼성이 독점하고 있는 HBM(High-Bandwidth Memory·고대역폭메모리) 개발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펼치고 있다. 메모리는 미국 제재로 구매가 불가능한 네덜란드 반도체장비업체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필요 없고 중국이 팩키징 등 후공정(OSAT)에서 높은 기술력을 가졌다는 걸 고려하면 충분히 선택가능한 대안이다.
다만 중국 D램기술은 삼성전자 등 글로벌 선두기업과의 격차가 5년 정도로 큰 편이기 때문에 적어도 4년은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반도체 산업은 어떤 길을 가게 될까?
SMIC는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를 이용해, 7나노공정에서 '기린 9000s' 생산에 성공했다. 하지만 TSMC가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이용해 7나노 미만의 초미세공정을 개발한 것처럼, 3/5나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필수적이다. 향후 관건은 중국이 이런 제약요인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다.
'기린 9000s'는 화웨이와 중국 반도체 산업의 발전속도가 우리 예상을 뛰어넘었음을 증명했다. 앞으로 중국이 낸드플래시·D램 등 한국 반도체 업체와 겹치는 사업분야에서 어떤 진척을 보일지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김재현 전문위원 zorba00@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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