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흔든 판결] 대법 “임차 건물명도, 보증금 반환보다 우선 아냐”
1·2심 법원 “계약갱신 없어…건물 비워야 보증금 반환”
대법원 “건물명도·보증금 반환, 상호 간 동시이행 관계”
’임차인 보호’ 방점 찍은 판결…주택임대차보호법 제정
1973년 9월 임대인 A씨는 본인 소유 건물 지하에 임차인 B씨와 1975년 5월 31일까지 임대차계약을 체결했다. 보증금 350만원 월차임(月借賃) 5만원에 임차 기간은 20개월. B씨는 이곳에서 다방을 운영했다.
임대인과 임차인이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많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둘 사이는 큰 갈등은 없었다. 문제는 1975년 6월부터 발생했다. B씨는 임차 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1975년 12월까지 다방을 운영하면서 A씨에게 매달 월차임 5만원과 관리비를 냈다.
오늘날 관점이라면 ‘묵시적 갱신’으로 A씨가 계약 갱신 거절을 밝히지 않았다면 임대차계약은 같은 조건으로 갱신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1975년은 상황이 달랐다. B씨는 자신이 낸 돈이 임대차계약 갱신에 따른 임대료로 생각했지만 A씨는 임대료가 아닌 불법점유로 인한 손해액 일부로 받은 것으로 판단했다.
의견 차이는 결국 법정 공방으로 비화했다. A씨는 다방이 차려진 공간을 비우라고 요구했지만 B씨는 임차보증금을 반환하는 것이 먼저라고 맞섰다. A씨는 B씨를 상대로 ‘가옥 명도소송’을 제기했다.
◇”보증금이 먼저냐, 건물 인도가 먼저냐” 기준 없었던 그 시절
1981년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제정되기 전 시기에는 ‘임차인 보호’라는 개념이 생소했다. 1970년대 들어 정부 중심의 산업화 추진으로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몰리면서 집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자연스레 부동산 투기와 주택 가격 상승도 맞물렸다. 임차인은 임대인보다 경제적 약자인 데다, 급격한 변호에 휩쓸려 보증금을 받지 못한 채 길거리에 나앉기도 했다. 전세권은 물권으로 법으로 보호받지만 임차권은 그렇지 못했다.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A씨와 B씨 갈등이 불거졌다. 법정 공방에서는 A씨가 승기를 잡았다. 1, 2심 법원은 A씨 손을 들어줬다. 임대한 장소를 먼저 비워야 보증금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나왔다.
1심 재판부는 “임대 기간이 만료되면서 임대차계약이 갱신되지 않았고, B씨가 A씨에게 지급한 돈은 불법점유에 따른 임대료 상당의 손해액”이라고 판시했다. 이어 “보증금 반환 청구권은 임차인이 임차물을 임대인에게 반환 또는 명도해야 A씨의 보증금 반환 의무가 발생한다”고 덧붙였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임차인의 임차 건물명도 의무가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 의무에 앞서는 선이행 관계에 있다”고 언급했다.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77년 9월 “임대차계약 기간이 만료된 경우 임차인이 임차물(건물)을 명도할 의무와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할 의무는 상호 간에 동시이행의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라며 하급심 판단을 뒤집었다. 임차 건물명도 의무가 보증금 반환 의무보다 앞서지 않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대법원 전합 판단…1981년 ‘주택임대차보호법’ 제정으로
입법 미비로 임차인 보호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주택임차인 지위를 안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특히 이 판결은 1981년 주택임대차보호법 제정으로 이어지는 기점으로 작용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을 통해 임차인은 임대차 등기가 없어도 주택을 인도받고 주민등록을 마치면 ‘대항력’을 갖췄다. ‘대항력’은 쉽게 말해 임대차 기간에 계속 거주할 수 있고, 보증금을 받을 때까지 집을 비우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의미한다.
동시에 임대차 기간을 1년 미만으로 정한 임대차는 그 기간의 정함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임대차 기간만료 전 6개월에서 1개월 이내에 임대인으로부터 갱신거절 통지가 없거나 조건을 변경하지 않으면 이전 임대차와 같은 조건으로 갱신한다고 규정했다.
1983년에는 임대차 기간이 만료하더라도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하기 전까지 임대차관계가 존속한다는 내용으로 법이 개정됐다. 보증금 회수를 보장한 셈이다. 이후 임대차 존속기간이 보장돼 기간을 정하지 않거나 2년 미만이라면 그 기간을 2년으로 규정했다.
◇후속 판례도 잇달아 ‘임차인 보호’에 방점
197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임차 건물명도 의무가 보증금 반환 의무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판시한 뒤 대법원은 임차인을 폭넓게 보호하는 방향으로 판결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주거생활 안정을 중요하게 바라본 것이다. 새로이 제정된 주택임대차보호법도 유연하게 적용했다.
대법원은 1987년 10월 ‘대항력’을 규정하고 있는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 제1항을 넓게 해석했다. 대항요건에 임차인 본인뿐 아니라 배우자의 주민등록도 포함되는 것으로 본다고 판단했다.
또 “주택임차인이 자신의 가족과 함께 주택을 점유하면서 가족의 주민등록은 유지하고, 임차인만 주민등록을 일시적으로 다른 곳으로 옮겼더라도 주민등록 이탈로 볼 수 없으므로 대항력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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