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폐지 안 당하게 도와드릴게요”… 심판해야 할 회계법인이 코치 역할을?
대형 회계법인 삼정KPMG는 지난달 28일 상장유지자문센터를 신설했다. 명칭대로 상장사가 상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문 서비스를 해주는 곳이다. 삼정KPMG는 회계·세무·부정조사·자금조달 분야 전문가 30여명으로 센터를 꾸리고, 박성배 감사 부문 대표를 센터장으로 앉혔다. 개별 기업의 상장 폐지 발생 사유와 관련해 이의 신청, 개선 계획서 작성 등 맞춤형 대응 전략을 짜준다는 게 삼정 측 설명이다. 한국거래소가 진행하는 상장 폐지 실질 심사 모든 단계에서 기업이 상장 폐지를 당하지 않도록 종합적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박 센터장은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경영진과 지배 구조에 대한 책임이 엄격해진 감독 환경 등의 영향으로 많은 기업이 상장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센터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상장 폐지 사유를 해소하기 위해 기업이 회계 자문, 지배 구조 개편, 재무 구조 개선을 위한 사업 조정 등 회계법인의 다양한 자문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활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란 얘기다.
‘상장 폐지 위기 기업 소생’이 대형 회계법인의 새 먹거리로 등장했다. 2018년 주식회사 등의 외부 감사에 의한 법률(신외감법) 도입으로 감사가 강화되면서 상장 유지가 어려워진 기업이 증가했다. 상장 폐지를 피하기 위한 자문 수요도 덩달아 커졌다. 이에 대형 회계법인을 중심으로 상장 폐지 위기 대응을 전담하는 조직이 만들어진 것이다.
앞서 올해 3월엔 삼일PwC가 상장유지지원센터를 만들었다. 상장 폐지 이유가 생겼거나, 발생 가능성이 예상되는 기업이 대상이다. 20여명의 전문가가 거래소의 상장 폐지 실질 심사에 대응할 방안, 자본 잠식 탈피를 위한 투자 유치 방안,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자문을 제공한다고 한다. 업계에선 삼일이 회계법인 중 상장 유지 자문 특화 조직을 가장 먼저 만들었다고 본다.
센터를 연 후 다수 기업이 자문을 받기 위해 삼일을 찾았다. 삼일 측에 따르면, 코스닥 상장사 A사는 감사 보고서에서 감사 의견 ‘거절’을 받아 주식 거래가 정지됐다. 삼일 상장유지지원센터는 A사의 회계 처리 과정에서 오류가 누적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A사는 삼일 측으로부터 오류 수정 방안을 안내 받고, 이를 반영해 재무제표를 정정했다. 이후 감사인으로부터 재무제표 적정 의견을 받아내 주식 거래가 재개됐다. 모두 3~4개월 안에 이뤄진 일이다.
금융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감사 의견 거절로 주식 거래가 정지된 기업이 새로 감사 의견을 받아 주식 거래가 재개되는 데는 통상 1년 이상 걸린다”며 “석달여 만에 거래가 재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라고 했다.
국내 ‘빅4′ 회계법인 중 EY한영과 딜로이트안진도 상장 유지 자문 분야 진출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회계법인의 이 같은 움직임에 일각에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부실 기업을 걸러내야 하는 회계법인이 온갖 수단을 동원한 부실 기업 살려내기로 돈벌이를 하는 것이 적절치 않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회계법인의 본업인 감사 업무와의 이해 상충 가능성도 제기된다. 감사의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다. 회계법인이 상장사 한 곳에 감사 업무와 상장 유지 자문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할 경우, 감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삼정KPMG 측은 “감사 의뢰 기업에는 외부 감사인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범위 안에서만 상장 유지 자문 서비스 제공이 가능하다”면서도 “독립성 이슈로 감사부문 고객에 상장유지자문을 제공하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했다. 삼일PwC 측은 “감사 부문 고객에 해당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앞으로 제공할 계획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주식시장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처한 기업이 상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서비스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세종 등 일부 법무법인은 일찍이 상장 유지 전문 대응팀을 만들어 운영해 왔다.
회계법인이 직접 전담 조직까지 만들어 이 분야에서 보폭을 넓히는 것은 그만큼 상장 폐지 가능성이 있는 기업이 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018년부터 신외감법이 시행되며 주기적 지정감사제, 내부회계관리제도 등이 도입됐다. 이에 따라 기업 회계 감사가 대폭 강화됐다. 복잡한 규정에 대한 해석 차이로 감사 보고서에 적정 의견을 받지 못하는 기업도 늘었다. 삼정KPMG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에서 연간 약 40개 기업에서 상장 폐지 사유가 발생했다.
또 최근 국내외 경제 상황 악화로 경영이 어려워진 한계 기업이 많아진 것도 이유로 꼽힌다. 회계업계가 자문 수요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고 시장 선점에 나섰다는 것이다.
회계법인의 부실 기업 ‘심폐 소생’ 사업에 비판적 목소리가 나오는 데 대해, 회계업계는 자문 수요가 늘어난 만큼 이를 충족시킬 서비스 공급도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회생 잠재력이 있는데도 경제 상황 급변 등으로 위기를 맞은 기업이 영업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회계업계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삼일PwC 상장유지지원센터를 이끄는 정지원 파트너는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상장 유지 자문을 제공하는 것은 소액주주 보호 차원에서도 필요한 서비스”라고 강조했다.
국내 한 회계법인의 감사 부문 임원은 “회계개혁법 등이 발효된 이후, 최근 2~3년 사이 감사 의견을 아예 받지 못하는 상장사가 많아졌고, 내부 통제 시스템 미비 등 다양한 이유로 상장 폐지 위기에 놓인 기업도 늘었다”면서 “법무법인이 주로 상장 규정에 대한 해석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달리, 회계법인은 기업 내부 회계, 감사 관련 이슈와 관련해 독보적인 전문성을 갖고 있다는 게 강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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