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과점’은 막고 ‘다양성’은 넓혀야 한국영화가 산다[화제의 책]

엄민용 기자 2023. 9. 10. 01:1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 죽이기



한국영화가 위기에 빠졌다는 목소리가 높다. 영화산업 안팎의 환경이 바뀐 데다 한국영화의 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영화의 아픈 구석을 꼬집은 한 권이 책이 나와 눈길을 끈다. ‘한국영화 죽이기’(배장수·권영락 지음 / 넥스트월드)다.

‘천만영화로 본 한국영화산업-포스트 봉·찬·수는 없다’를 부제로 한 이 책은 극장가에서 한국영화가 죽어 가는 상황에 대해 ‘스크린(상영) 독과점이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특정 영화들(대기업의 대자본 영화 등)이 상영을 독과점함에 따라 다른 상업영화나 독립·예술영화들은 설 자리가 없다. 약 20년에 걸친 특정 영화들의 독과점으로 인해 영화의 다양성과 관객의 향유권이 급격히 위축된 점이 오늘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영화의 미래를 선도할 젊은 인재들이 기회조차 잡을 수 없는 이런 시장에 뛰어들겠느냐”고 반문하며 “이대로 가면 한국영화와 영화산업의 미래는 없다. 영화와 극장을 살리는 정책 수립과 시행이 시급하다”고 전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상영 독과점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는 것이 영화계 안팎의 분석이다. 일례로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경우 개봉하는 날 전국 극장 좌석의 85.0%를 차지했다. 이날 총 상영작은 124편으로,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제외한 123편의 영화가 남은 좌석을 나눠 가졌다. 그중 박스오피스 2위 영화 ‘생일’의 좌석점유율이 4.3%에 불과했다.

이처럼 123편은 길이 없어 그냥 주저앉아 있는 상황에서 ‘어벤져스: 엔드게임’ 혼자 뛰었다. 그 결과 매출액 점유율에서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97.1%를 차지한 반면 나머지 123편의 몫은 고작 2.9%였다. 상영 독과점의 폐해, 영화산업의 일그러진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2019년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다. 2019년은 한국영화산업이 정점에 이른 해다. 극장의 관객 수, 매출액, 관람횟수, 1000만 영화 모두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배급·상영 과정에서 특정 영화로의 쏠림현상도 극심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 상업영화 45편의 극장 수익률은 마이너스 21.3%를 기록했다. 이 또한 역대급이다.

이런 사실들을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프로야구의 기록표처럼 숫자로 보여 주는 ‘한국영화 죽이기’는 결국 ‘한국영화 살리기’에 대한 이야기다. 3단 12장 73항으로 엮은 본문과 부록·도표를 통해 한국 영화산업의 현주소를 낱낱이 조명했다. ‘해운대’부터 ‘범죄도시2’까지 1000만 영화 24편의 상영현황을 들여다보고 ‘관객점유지수’(관객 수 / 빈 좌석 수) 등을 산출했다. 한국영화동반성장협의회의 자정 운동, 공정위의 시정명령, 영진위·문체부의 표준계약서 권고, 초대권·VPF(디지털 영사기 사용료) 소송 등 공정 생태계 조성을 위한 노력에도 주목했다. 이를 통해 “건강한 선순환 생태계를 근간으로 영화의 다양성이 꽃피어야 한국영화와 영화산업을 살릴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완성도 높은 새 영화가 꾸준히 나오지 않으면 극장도, OTT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영화정책은 영화 제작·배급·상영의 선순환 구조 구축에 맞춰야 한다. 당장의 관객 수 증대보다 진정한 활성화를 담보할 수 있는 환경과 구조를 갖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려는 핵심이다.

2022년 12월 현재 한국 1000만 영화 감독은 16명이다. 그리고 24편의 영화가 1000만 명을 돌파할 당시 16명의 감독들 나이는 36~49세였다. 젊은 영화인들이 신화의 중심이었던 것.

그러기에 저자는 “한국영화계의 아픈 현실은 이들 이후를 열어갈 신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다는 데 있다. 유능하고 열정적인 신진들이 보이지 않는 영화계에서 과연 영화·영화산업이 꽃을 피울 수 있겠느냐”며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포스트 봉·찬·수(봉준호·박찬욱·홍상수 감독)는 없다”고 단언한다. 이어 “상영 독과점 금지, 대기업의 배급·상영업 겸업 제한, 독립·예술영화 및 전용관 지원 제도화가 해결책”이라고 대안을 제시한다.

한편 정지영 감독은 “1000만 영화들의 독과점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최초의 전문서적으로서 한국 영화산업의 일그러진 현주소를 여과 없이 전한다”며 “한국영화를 살리는 길을, 제2의 봉준호·박찬욱·홍상수가 나올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이 책은 영화인은 물론 영화정책 입안자와 경제전문가들에게도 필독서가 될 만하다”고 일독을 권했다. 정 감독은 “어느 분야든 발전을 견인하는 것이 다양성인데, 한국영화계에서 독과점이 그 다양성을 좀먹고 있다”고 저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Copyright © 스포츠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