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촬영 현장…비 오기만 기다린 까닭은
‘주 52시간 노동’ 지켜야 하지만 감독 누구냐에 따라 ‘주 7일 노동’ 하기도…
“탕, 탕, 탕… 탕탕탕탕 탕.”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tvN)에서 김희성(변요한)은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파들을 한군데 모아 “후손들이 보아야 할 기록”이라며 사진으로 남긴다. 희성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셔터음은 총성으로 바뀐다. “이 장면에서 연출의 묘미를 느꼈어요. 저는 이런 게 너무 재밌는 겁니다.” 드라마 감독을 꿈꾸는 서연(가명)씨의 눈이 빛나던 순간이다.
영상 관련 학과에 입학해 차근차근 실무를 쌓은 서연씨는 졸업과 동시에 드라마 연출팀에 합류했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한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서연씨가 겪은 드라마 제작 현장은 “매운맛”이었다고 한다. 서연씨 인터뷰는 2023년 8월17일에 진행됐다.
‘드라마 찍는 게 상전이냐?’는 말은 이해되지만
연출팀 ‘막내’ 서연씨한테 떨어진 임무 중 하나는 ‘현장 통제’였다. 언론에서 ‘주민과 마찰을 빚었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는데, 바로 그 업무다. 촬영 현장에서 소음 발생은 필수고 교통 통제는 기본이다. 새벽 시간에 조명을 써야 할 때도 있다. 이렇듯 시민이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드라마 스태프는 종종 ‘갑질’을 행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서연씨의 갑질(?)은 어땠을까?
“‘드라마 찍는 게 상전이냐?’ 이 말을 가장 많이 들었어요. 욕도 들어봤고. 그때마다 속상해요. 하지만 이해합니다. 힘들었던 이유는 그게 아닙니다. 민원이 발생하면 촬영은 중단돼요. 외부 소리가 들어가니까. 그러면 촬영 시간은 더 길어지거든요. 그때 쏟아지는 시선이 있어요. ‘1분만 막으면 되는데 그걸 못하냐?’는 핀잔. 저 하나 때문에 전체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진짜 힘들었죠.”
때로는 억울한 일도 감수했다. 촬영 일정을 잘못 공지해 혼선이 생기면 ‘내 탓’이 맞지만, 상대방이 잘못 알아들은 것도 ‘내 탓’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일도 ‘적당히’ 잘해야 했다는 서연씨. 너무 잘하면 오히려 일을 떠맡게 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드라마 참여는 서연씨한테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다. “심부름이 주 업무였지만 엔딩크레디트에 이름이 올라간 순간 ‘이 일 하기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방송일을 반대하신 부모님도 화면을 갈무리해 돌려봤다고. 서연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인정받은 것 같았다며 미소를 지었다.
드라마 감독으로 성장하기 위해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안다. 하지만 배워야 하는 게 ‘주 7일 노동’ ‘대기노동’ ‘감정노동’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턴키계약(촬영·조명 등 파트별 팀장급 스태프가 인건비 등을 구분하지 않고 제작사와 일괄 계약한 뒤 일당을 팀원에게 나눠주는 방식)을 피부로 접했고,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관행에 적응하는 건 덤이었다.
쉬는 날 카톡 알람이 울리면 가슴이 ‘쿵’
“일주일 내내 일했어요. 기술직 스태프는 일주일에 사흘은 쉬었거든요. 그런데 연출팀은 다음 촬영을 준비해야 해서 계속 출근했죠. 어떤 감독은 하루 정도 쉬게 해주기도 하는데…. 결국 조연출 선배가 휴일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잘 안 됐어요.”
서연씨가 속한 연출팀은 3~4개월 고생해 기획한 드라마에서 결국 하차했다. 드라마 스태프는 법적으로 ‘주 52시간 노동’을 적용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위반 사례가 속출한다. 감독의 성향과 선의에 따라 준수 여부가 결정되는데, 연출팀은 직접적으로 영향받는다. 서연씨는 “하루 쉰다고 하면 무조건 잠만 잤어요. 놀 힘도 없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비 오면 촬영이 펑크 나거든요. 너무 힘든 날, 제발 비 좀 내려달라고 빈 적도 있어요.”
쉬는 날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방송판은 ‘언제 쉴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쉬는 날 카톡 알람이 울리면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요.” 서연씨는 일하면서 ‘약속 잡는 게 가장 힘들다’고 토로했다. 세전 200만원으로 턱없이 적은 월급이었지만, 쓸 시간조차 없어 차곡차곡 쌓인 서연씨의 통장 잔고는 방송노동자의 노동 실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연출팀 스태프는 다른 직군 노동자와 친밀감을 쌓는 게 중요하다는 서연씨. 방송계의 이상한 ‘호칭 문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 까닭이다. 업무를 잘하기 위해 ‘오빠’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조직문화(?)는 기이하지만, 현실이었다.
“연출팀은 부탁하는 게 일이에요. ‘진짜 죄송한데 이거 못하면 저 죽어요’ ‘이거 한 번만 해주세요’ 이렇게 매달려요. 이때 상대방과 친밀감이 있으면 편하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레 ‘형’이란 호칭을 쓰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어요. 나이 차이가 크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는데, 어중간할 때가 많아요. 기술직 감독님의 연배를 보면 10살 차이는 기본이니까, ‘오빠’라는 말이 안 나오죠. 그렇다고 ‘○○님’이라 부르면 거리감 느껴지고. (몇 살 차이까지 오빠라고 부를 수 있어요?) 마지노선은 한 자릿수이지 않을까요? 두 자리 넘어가면 삼촌이죠.(웃음)”
촬영 중 다쳐도 일 다 마치고 수술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안전은 뒷전이다. 그런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니 사고 위험이 늘어난다. 서연씨는 “사고 보도를 보면 숨이 막혀요. 나는 아닐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요”라고 뒷말을 흐렸다. “조감독이 촬영 중 크게 다친 적이 있는데, 드라마 촬영을 끝내고 수술했어요. 현장에서도 쉬라는 말을 못했다고 해요. 그 사람이 없으면 촬영 자체가 불가능했으니까….”
서연씨는 즐겁게 하는 일을 돌이켜보았지만 ‘능력이 아니라 체력이 좋아야 한다’거나 ‘방송사 공채로 들어가야 감독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나인 채로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바람이 이뤄지는 현장이 되기를 바란다.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
*‘막내’는 전문성을 깎아내리는 단어로 지양해야 하지만, 인터뷰이가 사용한 방송 제작 현장의 용어를 그대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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