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기적을 만든 강철 박스…트럭 기사의 도전에서 시작됐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맥린은 출발부터 특별한 면이 있었다. 트럭 하나로 일을 시작하면서도 그는 ‘맥린트럭운송회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야망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맥린트럭운송회사는 빠르게 성장했다. 2차 세계대전 특수로 성장하는 미국 경제, 빠르게 확장되어가는 미국의 고속도로망, 차입금을 적절한 레버리지로 활용하는 맥린의 투자 전략 등이 모두 맞물려 돌아간 덕이다. 맥린트럭운송회사는 1954년 트럭 617대, 자산 1140만달러, 총소득 순위 8위의 미국 트럭운송회사로 성장했다.
이 무렵 맥린은 성장의 정체를 경험했다. 시원하게 뻗어가던 고속도로에 정체현상이 빚어지기 시작했고 이것은 비용 상승을 불러왔다. 마침 그때 미국 정부는 전쟁에 투입됐던 선박들을 민간 회사에 헐값에 넘기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맥린은 군함 2척을 구입했다.
맥린은 이런 상상을 했다. “트럭에 트레일러를 싣고 부두로 와서 그 트레일러를 통째로 배에 옮겨 실으면 어떨까? 목적지 항구에 도착한 뒤 그 트레일러를 다시 트럭에 옮겨 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하역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이중으로 아낄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컨테이너’다.
혁신가와 몽상가의 차이는 상상을 실천에 옮기느냐, 아니면 상상에 그치느냐에 있다. 그런 점에서 맥린은 분명 혁신가였다. 그가 상상하고 현실화시킨 ‘컨테이너’는 물류 혁신을 가져왔고, 물류 혁신은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도 컨테이너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대한민국은 원자재를 수입해서 완제품으로 수출하는 가공무역으로 성장했다. 더구나 원자재 수입처와 완제품 수출처 모두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멀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물류 비용을 낮춰야 했는데 컨테이너가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컨테이너는 지리적 위치의 문제를 최소화함으로써 세계의 경제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저 바다 어귀에 자리 잡고 해안 민족들과 무역하는 자야,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을 들어보아라. 두로(타루스)야, 너는 스스로 말하기를 너는 흠없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네 경계선들이 바다의 한가운데 있고, 너를 만든 사람들이 너를 흠없이 아름다운 배로 만들었다. 스닐산의 잣나무로 네 옆구리의 모든 판자를 만들고, 레바논의 산에서 난 백향목으로 네 돛대를 만들었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로 네 노를 만들었고, 키프로스섬에서 가져온 화양목에 상아로 장식하여, 네 갑판을 만들었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수놓은 모시로 네 돛을 만들고 그것으로 네 기를 삼았다.
높이 40m, 둘레 2.5m까지 자라는 레바논 삼나무를 이용해서 페니키아인들은 다른 세력들을 압도하는 배를 만들 수 있었다. 레바논 삼나무는 목질이 단단해 튼튼한 선박을 건조할 수 있었고 송진이 많아 물 속에서도 오래 썩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이처럼 크고 튼튼하고 오래가는 배를 이용해서 페니키아는 지중해 연안 지역 및 그 너머까지 해상 교역망을 구축했고 식민지도 여러 곳에 건설했다. 그 가운데 가장 번성했던 곳이 바로 튀니지 지역에 위치했던 카르타고였다.
기록에 따르면 페니키아의 배는 아프리카를 한바퀴 돌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00년께에 이집트 파라오의 지시를 받은 페니키아의 선단은 홍해를 출발해 3년간의 항해 끝에 아프리카를 시계 방향으로 일주하고 이집트로 귀환했다.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발견하기 2000년전의 일이다.
현대에 올 때까지 서아프리카 지역의 무역을 레바논 상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시장은 레바논 상인들이 장악해왔다. 1940년대 외교관으로 시에라리온에 근무했던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레바논 상인들이 내륙지방의 모든 상점과 프리타운의 대부분 상점을 경영한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레바논 삼나무가 미친 영향이 이처럼 길고 깊다.
페니키아인들이 역사에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은 문자다. 페니키아 문자는 그리스로 유입돼 알파벳의 원형이 된다. 문자는 상인들이 무역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뱃사람 신드바드가 인도양을 일곱 번이나 항해하면서 겪은 진기한 체험담을 담은 얘기가 ‘신드바드의 모험’이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겪은 항해와 교역을 통해 주인공이 바그다드의 부호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드바드는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페르시아어로 ‘인도의 바람’이라는 뜻이다. 인도양을 항해하는 배들이 이 지역의 계절풍, 몬순을 이용해서 항해했기 때문에 신드바드는 이 지역의 해양상인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됐다.
홍해~페르시아만~아라비아해 연안~인도양~동남아시아로 이어지는 바닷길 교역이 본격화된 8세기부터 이슬람 상인들은 이 지역의 해상 무역을 주도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다우선’이라는 배를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상인들이 장악한 해상교역권을 다우(Dhow)교역권이라고 부른다.
다우선은 최대 3백톤 규모로 적재 중량만 180톤이 넘었다. 이슬람 대상이 운송수단으로 이용했던 낙타 6백마리가 실을 짐을 배 한 척으로 수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푸젠 상인들은 정크선을 이용해서 동남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장악했다. 정크선은 선수가 평탄하고 선미의 갑판이 높으며 사각의 돛을 단 세 개의 돛대를 가진 평평한 바닥의 배였다.
정크선은 15세기 초 명나라 ‘정화 함대’의 아프리카 원정에도 사용됐다. 정화 함대의 정크선은 전장 150m, 선폭 60여m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나설 때 이용한 ‘니나호’ 보다 12배 컸다.
북유럽 한자 동맹 도시들이 번성한 배경에는 역시 우수한 선박이 있다. 특히 발트해에서 사용하는 코그(Cog)선은 이 지역의 얕은 바다에 최적화한 선박으로, 바닥이 평평하고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었다. 특히 코그선에는 방향을 조정하는 중앙타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선박 조종을 혁신적으로 개선했다.
대항해시대를 이끈 것은 카락선과 캐러벨선이라는 범선이었다. 카락선과 캐러벨선은 한자동맹 도시에서 사용하던 코그선의 장점과 지중해에서 주로 전투용으로 쓰이던 갤리(galley)선의 장점이 결합된 선박이었다. 사각 돛이 도입되었고 돛대가 하나에서 세 개 또는 네 개로 늘어났고 선박의 적재 용량 역시 크게 늘어났다. 바스코 다가마 함대를 포함해 희망봉을 건넜던 함대들은 카락과 캐러벨이 혼합되어 구성됐다. 콜럼버스가 이끌던 함대 역시 카락 2척과 캐러벨 3척으로 구성됐다. ‘정복’과 ‘교역’을 동시에 추구했던 대항해시대를 상징하는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184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미국의 조선업과 해운업도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당시에는 아직 미국 대륙 횡단철도와 파나마운하가 건설되기 전이라서 미국 동부 해안에서 캘리포니아 해안까지 남아메리카 대륙을 돌아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배가 필요했다. 이때 도널드 맥케이(Donald Mackay)라는 조선업자가 클리퍼(clipper)라는 대형 범선을 내놓았다.
2000톤에 육박하는 대형 범선인 클리퍼는 유선형 선체에 돛을 많이 달아서 놀라운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98일이 소요된 클리퍼는 캘리포니아의 금 수송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그뿐 아니라 태평양을 가로질러 홍콩으로 가는 항로를 개발해서 차 무역에 뛰어들기도 했다. 말하자면 클리퍼가 태평양 횡단 무역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로스앤젤레스(LA)를 연고지로 하는 NBA 농구팀의 이름이 ‘LA 클리퍼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석탄을 연료로 쓰던 선박들이 대부분 디젤 엔진으로 전환했고, 이에 따로 배의 속도도, 화물 적재량도 크게 증가했다.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다시 디젤 엔진으로 화물선의 속도와 톤수는 크게 바뀌었지만 부두의 하역 노동자들이 일일이 짐을 싣고 내리는 운송방식은 수세기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이로 인해 항구는 여전히 돈을 잡아먹는 병목 지점이었다. 수출이나 수입에 드는 비용의 절반이 항만에서 버려졌다.
지게차와 기중기가 도입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일은 항만 노동자의 근육에 의지해야 했다, 하역 작업이 전적으로 노동자에 의지해야 됐기 때문에 항만 노조의 권한 역시 막강해졌다.
맥린도 항만노조의 횡포로 여러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1958년 맥린은 뉴어크항에서 푸에르토리코항으로 배 두척을 보냈는데 항만노조가 하역을 거부했다. 그렇게 4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맥린은 어쩔 수 없이 항만노조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다음해인 1959년에는 항만노조의 파업으로 맥린은 파산 위기까지 몰렸다. 맥린이 컨테이너 도입의 절실하다고 절감한 순간이었다.
사실 맥린이 컨테이너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이전부터 컨테이너는 존재했다. 이를 본격적으로 사업화한 것은 분명 맥린의 공헌이다. 특히 맥린은 컨테이너를 트럭, 기차, 선박 등 다양한 운송 수단에 동시에 적용하기능하게 만들어 연속적으로 이동시킬 수 있게 했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물류의 혁명적 변화를 초래한 핵심 요소다.
컨테이너 표준화를 이끈 주인공 역시 맥린이었다. 맥린이 처음 컨테이너를 도입했을 때 다양한 형태의 컨테이너가 난립하고 있었다. 처음 맥린이 도입한 사이즈는 10.0584m(33피트)였고 이후 10.668m(35피트)를 도입했다. 말컴의 경쟁자 중에는 이보다다 작은 5.181m(17피트)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것보다 큰 사이즈를 선호하는 항운사도 있었다.
맥린은 그가 개발한 컨테이너 특허를 ISO에 무료로 제공함으로써 표준화를 주도했다. 1968년 ISO가 제정한 ‘ISO 668 시리즈1 화물 컨테이너 – 분류, 치수 및 등급’은 표준 컨테이너 근간이 됐다.
컨테이너 표준화로 선박, 트럭, 기차간 이동이 가능한 인터모달리즘이 완성됐다. 컨테이너 야적장에 컨테이너들을 테트리스처럼 빈틈없이 싸을 수 있는 것 역시 표준화 덕분이다. 컨테이는 제조사와 관계없이 동일한 ISO 사양에 따라 알루미늄 또는 강철로 구성됐다.
크레인으로 옮길 수 있게 귀퉁이의 홈의 위치, 깊이, 크기까지 표준화됐다. 이처럼 운송과 고정을 위한 장치를 ‘트위스트락’(twist lock)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맥린의 동료 케이스 텐트링거’가 창안했다. 텐틀링거는 컨테이너 여덟 귀퉁이에 고정용 고리(corner fitting)를 달고, 그 수평면 구멍에 잠금장치(twist lock)를 90도로 끼워 돌리는 결박 장치를 고안한 것이다. 이 장치에 맞춰 컨테이너용 기중기, 냉장 컨테이너용 전력 공급장치 등도 만들어 졌다.
컨테이너를 세는 단위인 TEU(Twenty foot Equivalent Unit)와 FEU(Forty-foot Equivalent Units)도 표준화로 가능해졌다. 20피트 컨테이너 한 개는 1TEU, 40피트 컨테이너 한 개는 1FEU가 된다.
컨테이너 표준화에 따라 국제 해운에서 가장 중요한 운하인 수에즈운하와 파나마운하를 지나갈 수 있는 컨테이너선의 크기도 정해졌다.
수에즈 운하는 폭 약 205m, 깊이 약 24m의 좁은 수로로, 통과 가능한 선박의 크기가 길이 400m, 폭 77.5m로 제한되며, 컨테이너는 최대 19,000TEU까지 선적할 수 있다. 해운사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선박의 크기를 맞춰 선박을 제작하고, 이 표준 크기를 ‘수에즈막스(Suezmax)’라고 칭한다.
갑문식 운하로 건설되어 파나마 운하를 오갈 수 있는 체급의 ‘파나막스(Panamax)’ 선박은 최대 길이 294m, 폭 32.3m, 4,500 TEU로 제한되었다. 해운 물량 증가와 선박 대형화 추세에 맞춰 파나마 운하 확장을 진행했고, 길이 366m, 폭 49m, 14,999 TEU의 선박까지 통과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기준을 충족하는 선박들은 ‘네오파나막스(Neo-panamax)’라 불린다.
이전에는 상품들을 개별적으로 취급하고 포장하고 하역 노동자들이 직접 하역해야 했지만 컨테이너는 이러한 과정을 단순화시켜 운송 비용을 크게 줄였다.
더 낮은 운송 비용과 더 빠른 배송 시간은 전 세계적인 무역을 촉진시켜 세계 경제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게 했다.
산업에 필요한 공급망이 확장됨에 따라, 더욱 세분화된 산업과 생산 과정이 발전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이나 전기자동차 같은 고부가가치 생산품은 국경을 넘어온 수만개의 부품들이 조합되어 완성되는데 컨테이너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1965년 미군 병참 운영을 총괄하던 프랭크 배슨 장군은 베트남 군수품 수송에 컨테이너를 도입하기로 하고 맥린에게 현지 조사를 맡겼다.
맥린과 미군 연구팀의 조사를 거쳐 1965년 11월 미군은 군수품의 수송에 컨테이너를 활용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1966년 1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최고위급 회의 자리에서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민간기업과 계약을 맺어 항구의 제반 시설 운영 등 해당 기업이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업무를 맡기기로 한다”는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다. 여기에 맥린의 회사인 시랜드가 참여하기로 결정됐다.
컨테이너가 도입되면서 베트남의 군수 물자 수송 작전은 빠르게 정상화됐다. 마크 레빈슨이 쓴 <더 박스: 컨테이너 역사를 통해 본 세계경제학>에서는 당시 베트남의 변화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야말로 하룻밤에 (베트남) 캄란만은 대형 컨테이너 항구로 바뀌었다. 캄란만에 마련된 여러 개의 부두 중 하나가 대형 컨테이너 크레인을 지탱할 수 있도록 새롭게 설계되었다. (중략)
2주에 한 번씩 거대한 컨테이너선이 캄란만에 600개가량의 컨테이너를 실어 날랐다. 5분의 1은 육류와 농산물, 아이스크림 등을 넣은 냉동 컨테이너였다. 나머지 컨테이너들은 탄약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수품이었다. (중략) 1967년의 미군 역사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항구의 만성적인 적체 현상 문제는 해결되었다.’”
1969년부터 미군은 베트남의 54만명이나 되는 육군부대와 선원, 해군과 공군부대를 운영할 수 있는 충분한 생필품과 군수품을 아무런 문제없이 공급할 수 있었다. 컨테이너의 효과를 확인한 미군은 베트남 뿐 아니라 세계 모든 미군기지의 보급에 컨테이너를 활용했다. 이렇게 되자 컨테이너화에 미온적이던 물류 기업들이 모두 컨테이너를 도입했고 이 과정에서 컨테이너는 트럭과 기차, 선박으로 모두 수송이 가능하도록 표준화됐다.
미군이 컨테이너를 도입하기 전 전세계 물동량의 10%만이 컨테이너를 이용했는데 그 이후에는 80% 이상이 컨테이너를 활용하게 됐다. 석유 같은 에너지와 일부 벌크선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모든 수송이 컨테이너를 활용하게 된 것이다.
“우리 회사는 미군의 정책에 의해 이제 베트남에서 텅 빈 채로 돌아오는 선박들만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 회의가 열렸지요. 맥린 사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쓰이상사에 아는 사람 있습니까?’”
맥린은 미쓰이그룹측에 일본에 시랜드사를 위한 컨테이너 부두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일본은 맥린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고베와 요코하마를 컨테이너항으로 만들어 빈 배를 채워줄 테니 운송비를 싸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됐다.
한국 정부도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컨테이너의 위력을 확인한 한국 정부는 1974년 부산항 종합 개발 사업을 시작해서 컨테이너 전용부두 건설에 착수하였고 1978년에 5만 톤 급 컨테이너 2척이 동시 하역이 가능한 컨테이너 전용항을 부산에 만들었다. 수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 경제는 컨테이너가 보편화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한강의 기적도 어쩌면 컨테이너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0년대는 한국뿐 아니라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소위 아시아의 4마리 용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시기였다. 멀리 떨어졌다는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거대한 미국의 소비 시장과 직접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역시 컨테이너가 가져온 기적이었다.
중국이 개혁 개방 후 세계의 공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컨테이너가 있어서 가능했다. 2022년말 기준 세계 10대 컨테이너항만을 보면 싱가포르, 부산, LA를 제외한 7개 항만이 모두 중국의 항구들이다.
어떤 형태의 물류 혁신이건 그 바탕에는 컨테이너가 최소화해놓은 물류 비용이 있다. 컨테이너로 이루어지는 화물의 국가간 이동으로 물류 비용을 사실상 장애물이 되지 않는 상태까지 낮춰놓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컨테이너가 물류를 ‘마찰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단순한 강철 박스였던 컨테이너도 기술 발전에 의해 여러가지 기능이 추가됐다. 무선 주파수 식별이나 RFID 등의 기술로 실시간 추적 및 모니터링이 가능해졌다. 우리가 편리하게 활용하는 이커머스 플랫폼은 기본적으로 컨테이너 시스템에 의지하고 있다.
그는 초대형 이콘쉽(Econship) 14척을 한국의 조선사에 발주했다. 맥린은 위성이 지구궤도를 돌 듯이 이 배들이 동쪽방향으로 세계의 바다를 돌면서 물건을 운송하도록 했다. 그렇게 되면 선박이 빈 상태로 돌아오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이번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국제 기름값이 안정이 됐고, 또 시간표에 맞춰 세계의 바다를 순항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986년 맥린은 12억달러의 부채로 파산했다. 당시까지 최대 규모의 파산이었다.
파산으로 상처를 받은 그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숨어들어갔고 맥린이 일궈왔던 시랜드는 1999년 머스크에 합병됐다.
2001년 5월 25일 87세를 일기로 맥린이 사망했을 때 전세계의 바다를 항해하던 컨테이너선과 항구에 정박중이던 컨테이너선이 일제히 길게 경적을 울려, 이 모든 물류의 혁신을 가능하게 했던 그를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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