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 히데키의 자살을 바라지 않은 까닭은?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1946년 5월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앞두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일본 쪽 용어로는 '대동아전쟁')에서 저질러졌던 전쟁범죄의 총책으로 꼽혔던 두 인물은 일왕 히로히토(裕仁, 1901-1989)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였다. 그러나 막상 재판이 시작되자 둘의 운명은 엇갈렸다. 히로히토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도조는 2년 반에 걸친 재판 끝에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승자인 미국은 재판을 앞두고 두 가지 기준을 세웠다. △히로히토 처벌이 일으킬지 모를 혼란을 피하고 일본을 안정적으로 통치한다. △종전 뒤 벌어지기 시작한 미·소 갈등과 동서냉전 구도 아래서 일본을 친미 반공국가로 붙잡아둔다. 이런 기준 아래, 사실상 전범 총책인 히로히토를 도쿄 재판의 피고석에 세우질 않았다. 그와는 달리, 도조는 재판 내내 그가 모셨던 주군을 감싸는 태도를 보이다가 1948년 12월 다른 6명의 사형수와 함께 죽었다.
'자주(自主) 재판'이라는 꼼수
도조 히데키를 중심으로 도쿄 재판을 들여다 보기 앞서, 일본이 스스로 전범자들을 처리하려했던 대목을 먼저 살펴보자. 포츠담선언(1945년 7월26일)을 통해 미국·영국·중국 3국 지도부는 일본의 항복을 촉구하면서 다음 사항에 합의했다(소련은 아직 일본과 전쟁을 벌이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 선언에 서명하지 않았다). △일본을 전쟁으로 이끈 군국주의자들의 영구적인 축출(제6항) △전쟁범죄자에 대한 엄중한 심판(제10항)이었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은 선수를 치려했다. 다름 아닌, 일본 국내법에 따라 전쟁범죄를 다스리려는 꼼수를 부렸다. 이름 하여 '자주(自主)재판'을 열겠다는 것이었다. 전승국들이 일본에 대한 전범재판을 주관할 경우, 그 재판이 '승자의 재판' 또는 '정치재판'이 되는 것이 뻔하므로 이를 막겠다는 명분 아래서였다.
히로시마(1945년 8월6일)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8월8일), 나가사키(8월9일)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은 이미 운동장이 기울었음을 확실하게 말해주었다. 일본의 전쟁지도부는 패전-항복은 죽기만큼 싫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으로 여기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자주재판론'은 같은 패전국인 독일에선 없던 움직임으로, 아직도 오만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일본 전쟁지도부가 벌인 꼼수였다.
1945년 8월 9일, 최고전쟁지도자회의에서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 참모총장은 (항복 조건으로) △전쟁범죄인 처벌과 관련해 일본 측에서 (자주)재판을 하든지, △아니면 상대측만으로 구성한 재판을 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부대조건을 붙이라고 주장했다. 우메즈를 비롯한 일본 군부의 강경파들이 패전(일본 쪽 용어로는 '종전') 무렵에 내걸은 주장들은 △전쟁범죄 처벌은 일본 정부가 직접 맡아서 일본 국내재판의 피고석에 전범자를 세우고 △일본군 지휘부가 일본군의 해체를 맡고 △점령군의 일본 영토 주둔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이장희(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교수의 글을 참고로 옮겨본다.
[1945년 9월11일, 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는 태평양전쟁이 터질 당시 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 등에 대해 전범체포 제1차 지령을 내렸다. (그동안 자주재판을 저울질하던) 히가시쿠니노 나루히코 내각은 이에 충격을 받아 서둘러 대책을 강구하였다. 다음 날, 일본 정부는 전쟁범죄를 시급히 조사하여 자주적인 재판을 실시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보고를 받은 일왕 히로히토는 자기 이름으로 전범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는 일이라면서 재고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다시 열린 각의에서도 동일한 결론이 나자, 히로히토는 이를 승인하였다](이장희, 「도쿄국제군사재판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비교 연구」동북아역사논총 25호, 2009년).
이른바 '자주재판'은 현실적으로도 어려운 것이지만, 논리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히로히토의 측근으로 내(內)대신을 지냈던 기도 고이치는 '천황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고, 다시 천황의 이름으로 재판을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라 봤다. 아무튼 일본의 자주재판 시도는 맥아더 사령부 쪽에서 한 마디로 '노!'라고 묵살하면서 물거품이 됐고, 그야말로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 만에 하나 일본이 자주재판을 했다면, 과정이나 결과는 어땠을까. 전쟁범죄를 축소·왜곡하면서 처벌 받는 피고인 숫자나 형량을 줄였을 것이 뻔하다.
도조의 자살을 바라지 않은 까닭
도조 히데키는 맥아더 사령부의 전범체포 제1차 지령이 내려졌던 당일(1945년 9월11일) 집으로 들이닥친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혀 압송됐다. 도조에게 따른 죄목은 침략전쟁을 금지한 부전조약(1928, 일명 켈로그-브리앙조약)을 어기고 진주만 공습으로 침략전쟁을 벌였고, 미국(필리핀)과 영국(홍콩), 프랑스(인도차이나), 네델란드(인도네시아) 영토를 침략했고, 전쟁포로(POW)들을 학대했다는 것이었다.
미군 헌병이 밖에서 현관문을 두드리자, 전쟁범죄자로 붙잡혀 간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가슴에 총을 쏴 자살을 꾀했다. 패전 뒤 "전쟁에서 이긴 자들이 만든 법정엔 서지 않겠다"고 그가 입버릇처럼 말해온 것을 행동에 옮긴 셈이었다. 따지고 보면, 도조가 자살한다는 것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히로히토와 그의 궁정 측근들은 도조가 스스로 목숨을 끊길 바랐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조가 죽는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겨난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검사들은 전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추궁할 것이고, 그 화살촉은 히로히토를 겨누게 될 것임은 누구라도 내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도조가 죽는다면 히로히토에게 매우 불리해진다. 도조가 법정에서 '천황은 전쟁 책임이 없다. 일본 군부가 앞장서 진주만 공습을 주장했다"고 해야 히로히토에게 그나마 전범 기소를 피할 수 있는 숨통이 열린다.
1945년 9월 들어 도조가 자살할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패전의 책임을 지고 도조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반응도 나왔지만, 히로히토를 국체(國體)로 여기고 지켜내려는 쪽에선 자살을 말려야 했다. 시모무라 사다무 육군장관이 나섰다. 그는 9월10일 관저 귀빈실로 도조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군사재판에서는 전쟁 책임의 소재를 추궁할 것인데, (히로히토 일왕의 면책을 포함해서)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아니, 당신이 없으면 심리도 (히로히토에게) 대단히 불리해집니다, 만일 폐하께 누를 끼쳐드리는 사태라도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송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호사카 마사야스,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페이퍼로드, 2012, 591쪽).
도조의 전진훈, '포로 되지 말고 자결하라'
8월15일 패전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잇달아 나왔다. 도조 내각에서 문부장관을 지내며 학생들에게 군국주의 이념을 강요했던 하시다 구니히코, 군부 강경파 육군장관 아나미 고레치카 등이 그러했다. 자결한 장성급 군인은 1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런 소식들이 알려지면서 자연스레 관심은 도조 히데키가 자살할 것이냐에 모아졌다.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도조는 자살을 서두르진 않았다. 집안에 틀어박혀 집무 메모나 비망록 등 각종 문건들을 태우느라 바빴다. 집 마당에선 연기가 사흘 동안 계속 피어올랐다. 따지고 보면, 그가 그동안 저질러 왔던 전쟁범죄의 증거물들을 태운 셈이었다. 1930년대의 만주 관동군 헌병사령관과 참모장 시절에, 일을 빠르고 꼼꼼하게 처리해 '가미소리'(剃刀, 면도날)란 별명을 얻었던 도조는 스스로 많은 기록을 남겼다고 알려진다. 그러니 없애야 할 주요 문건들이 오죽 많았을까 싶다.
그 무렵 도조가 자살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내다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도조 자신이 '전진훈'(戰陣訓)을 일본군 장병들에게 그토록 강조했던 당사자라는 점이었다. 전진훈은 1941년 1월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문건으로, '전장에서 지켜야 할 도덕과 마음의 자세'를 다루었다. 특히 '살아서 포로로서 창피를 당하지 말고 죽어서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것을 강조했다. 한 마디로 '포로가 되느니 자살하라'는 것이 전진훈의 핵심이다.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의 도조가 패전으로 더욱 소심해졌을 상황에서, '지난날 그런 섬뜩한 훈령을 내놓은 당사자가 자살을 망설인다'는 비난에도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조는 내키지 않더라도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집 근처에 사는 의사를 찾아가 심장의 위치를 물어보고 그 부분에다 동그라미를 그린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시모무라 사다무 육군장관을 만나고 온 다음날(1945년 9월11일) 미군 헌병 30여 명이 도조의 집 바깥을 둘러쌌다. 기자들도 몇 명 와 있었다. 자신의 체포가 다가왔음을 눈치 챈 도조는 미리 가슴에 그려둔 동그라미를 권총으로 쐈다. 하지만 자살에 실패했다. 6번째 늑골과 7번째 늑골 사이를 통과한 총알이 심장을 살짝 비껴가는 바람에 치명상을 입진 않았다.
총소리를 듣고 미군 헌병이 군화를 신은 채 집안 응접실로 뛰어들고 혼란스런 상황이 이어졌다. 그때 그야말로 우연히 그런 상황을 두 눈으로 본 일본 기자가 하나 있었다. 아사히신문 출판국 기자였던 하세가와 유키오다. 그는 외국인 기자의 부탁을 받아 도조의 집을 안내하려고 왔다가, 총소리를 듣고 미군 헌병들과 함께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호국의 귀신이 되고 싶었다"
도조의 가슴에선 피가 솟구치고 얼굴은 창백했다. 같이 갔던 외국인 기자가 하세가와의 옆구리를 찔렀다. 뭔가 일본말로 중얼거리니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라는 눈치였다. 하세가와가 도조 곁에 바짝 붙었다. 도조는 그에게 더듬거리며 '한 방에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날 병원으로 실려가기 전 응급처치를 받으며 15분가량 도조가 띄엄띄엄 했던 말을 하세가와는 훗날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한 방에 죽고 싶었다. 시간이 걸린 것이 유감이다. 대동아전쟁은 정당한 싸움이었다. 일본 국민과 대동아 민족에게는 (패전이)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법정에 선 전승자 앞에서 재판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정당한 비판을 기다리겠다. 할복을 생각하긴 했지만 자칫하면 실수할 수가 있다. 천황폐하 만세. 몸은 비록 죽더라도 호국의 귀신이 되어 최후를 마치고 싶다"(하세가와 유키오, 「도조 할복 목격기」文藝春秋 1956년 8월호).
여기서 도조가 할복을 마다했던 이유로 '실수'를 꼽은 것은 치밀하지만 소심했던 도조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본 연재 9에서 야스쿠니 신사를 다루면서, 자살특공대 총지휘관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이 (히로히토가 항복을 선언한 다음날) 할복으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카미카제의 아버지'란 별명을 지녔던 오니시는 일본인들이 흔히 '가이샤쿠'(介錯)란 부르는 할복 보조자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무사들이 일본을 지배하던 시절, 할복은 명예로운 죽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혼자 할복한다는 것은 숨이 넘어갈 때까지 엄청난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가이샤쿠는 할복자 바로 뒤에 서 있다가, 할복자가 칼로 자신의 배를 L자 모양으로 찌르자마자 목을 쳤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줄여주는 것이 가이샤쿠의 임무였다. 오니시는 그런 도움을 받질 않았기에, 15시간 동안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도조는 오니시의 단독 할복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고통을 자신이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감시병들, 도조를 '혼혈아'라 조롱
도조는 미군 감시병들로부터 '혼혈아'라 조롱받기도 했다. 자살 미수로 많은 피를 흘렸기에, 미군 부상병들이 수혈을 받을 때 쓰던 피를 도조의 혈관 속에 흘려 넣었기 때문이었다. 도조는 감옥에서 틀니를 치료했다. 미국인 기공사는 그 틀니에다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ur)를 뜻하는 RPH 글자를 새겨 넣었다. 도조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가 음식을 씹을 때마다 RPH 글자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도조는 처음엔 전시에 포로수용소로 쓰였던 오모리 수용소에 갇혔다. 다른 전범자들이 잇달아 오모리에 들어오고 이곳이 좁아지자, 1945년 12월8일(4년 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던 날과 같은 날) 스가모 형무소로 옮겨갔다.
일본 주요 전범들은 미군 감시병들로부터 그들의 지난날 지위에 걸맞는 대우를 받진 못했다. 진주만 공습으로 비롯된 전쟁 피해와 전우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미군 장병들이 그들을 잘 대해주길 바라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특히 전쟁범죄의 주범으로 찍힌 도조는 인간적인 모멸을 견뎌내야 했다. A급 전범들을 비롯한 일본 군부 요인들을 두루 취재해온 논픽션 저널리스트 호사카 마사야스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도조에게 호감을 갖지 않은 미국인 장교 중에는 (구치소 감방 안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는 도조를 신경질적으로 발로 차기까지 했다. 도조의 법정 변론에 호감을 갖지 않은 병사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멸 섞인 태도로 도조를 대하면서 기분을 풀었다. 도조는 (같은 수감자인) 시게미쓰에게 "이런 취급을 받느니 일찌감치 목을 매달리는 게 나을 것"이라 불평했다. 날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서 그의 분노는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호사카 마사야스, 649쪽).
도조가 수감 중 내내 미군 감시병들로부터 모욕을 당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는지 미군 감시병들과 말다툼을 벌이거나 법정에서 이를 문제 삼고 항의하진 않았다. 다만 교수형이 확정된 뒤 처형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구치소장(미군 대령)을 만났을 때, 그동안 도조를감시해온 미군들의 모욕적인 태도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시해 주었으면 합니다."
도조의 법정 투쟁, "자위 전쟁이었다"
구치소에서 미군 감시병들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도조는 변호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법정투쟁을 열심히 해나갔다. 그가 법정에서 했던 발언을 모은 자료집을 보면, 미국인 수석검사 조셉 키넌을 상대로 줄기차게 입씨름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불리한 대목에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리면서도 "법정에서든 신 앞에서든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는 대로 말할 뿐"이라 우겼다.
도조가 했던 주장들을 모아보면 △오로지 자위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했다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았다 △백인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려 했다 등등이다.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는 주장이고 궤변이나 다름없지만, 참고로 그가 했던 말들을 자료집에서 옮겨본다.
"1941년 12월8일의 그 전쟁(진주만 공습)이 일어난 이유는 미국을 세계대전으로 유도하고자 한 연합국 측의 도발에 있으며, 일본은 오로지 자위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했다고 확신한다. 동아시아에서 중대한 이해관계를 갖는 나라(중국 포함)들이 전쟁을 바란 이유는 이외에도 많다. 그러나 개전 결정은 일본의 최후의 수단이자 긴박한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극동국제군사재판소 엮음, <A급 전범의 증언: 도쿄전범재판 속기록을 읽다>, 언어의 바다, 2017, 239쪽).
"일본 제국이 국책으로 채택한 방침, 또는 당시 합법적으로 선발된 관료가 채택한 방침은 침략도 착취도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은 냉엄한 현실에 봉착했다. 당시 국가의 운명을 헤아리고 살펴야 할 책임을 진 우리가 한 일은 국가 자위를 위한 것뿐이다.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었다. 그리고 졌다. 눈앞에 보이는 것과 같은 사태를 야기했다"(240쪽)
1947년 12월30일 도쿄 법정의 증언대에 선 도조는 위와 같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상당히 긴 시간을 보냈다. 법정의 방청객들 얼굴에도 지루하다는 표정이 스쳐갔다. 하지만 도조는 자신의 말에 취한 듯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하며 동어반복식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발언 끝 부분에 다시금 일본의 전쟁은 '일본의 자위를 위해 벌인 전쟁'이며, 그 자신이 피고석에 선 것은 '승자에게 기소 당했기 때문'이라 강조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이 전쟁은 자위전이었고, 현재 통용되는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은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일찍이 일본이 이 전쟁을 함으로써 국제 범죄자가 되어 승자에게 기소 당하고, 패전국의 적법한 관료가 개인 자격으로 국제법상의 범인이 되며, 조약 위반자로서 지탄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극동국제군사재판소, 240쪽).
아시아인을 위한 해방 전쟁?
지난 주 글에서 도쿄 재판의 11인 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인도 출신 법관 라다비노드 팔(Radhabinod Pal)의 친일적 행태를 살펴봤었다.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에 반감을 지닌 팔 판사는 순진하게도(?) 일본의 이른바 '대동아전쟁론'을 서구 식민주의에 맞선 아시아해방론으로 잘못 받아들였다. 일제가 내걸었던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라는 구호는 실은 일본의 이익을 위한 기만적인 정치선전에 지나지 않았다.
팔 판사가 지지했던 인도국민군(INA)의 지도자 찬드라 보슈(1897-1945)도 일본의 맨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긴 팔 판사와 마찬가지였다. 1943년 11월 도조 히데키는 도쿄에서 '대동아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에는 일본군이 점령했거나 일제의 영향력 아래 있던 아이사 지역의 지도자들이 참석했었다.
그들의 이름을 꼽아보면, 괴뢰 만주국의 장징후이(張景恵), 난징 국민정부의 왕징웨이(汪兆銘), 필리핀의 호세 라우렐, 버마(미얀마)의 바 마우, 태국의 완 와이타야쿤, 자유인도(임시정부)의 찬드라 보슈 등이었다. 이들은 이름만 그럴듯한 '대동아 공영권 건설' 깃발 아래 모여들었지만, 영국과 미국을 견제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이용만 당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도조는 도쿄 법정에서 뻔뻔스럽게 이런 주장을 폈다.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된 정치적 이유 중 하나는 동아시아의 해방이었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목적 달성에 충실하고자 어떠한 유린 행위도 없이 동아시아의 해방을 실행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립은 인정해야 할 곳에는 독립을 주고, 자치를 주어야 할 곳에는 자치를 주어 잃어버린 땅을 되찾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극동국제군사재판소 엮음, 225-226쪽).
동티모르 사람들이 겪은 일본 '해방군'
지난 2001년 동티모르 분쟁 취재를 갔을 때 만났던 그곳 촌로들은 일본군의 만행을 잊지 않고 있었다. 1942년 초 2만 명의 일본군이 티모르(당시 동티모르는 포르투갈 식민지, 서티모르는 네델란드 식민지)에 상륙했을 때 그곳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환영했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백인 지배자들로부터 당신들을 해방시키려 우리가 왔다"고 했다.
그러나 티모르 사람들이 '피부만 황색인 또 다른 제국주의자들'이 몰려왔음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1943년 1월 티모르를 완전 장악한 일본 '해방군'은 티모르협곡을 사이에 두고 바로 남쪽에 있는 호주를 넘보면서, 현지 주민들에게 탄약과 군량미를 나르고 군용도로를 닦는 따위의 강제 노동을 떠맡겼다. 티모르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도 잦았다. 한 마을을 삥 둘러싸고 여성들을 집단 강간하는 일도 벌어졌다.
2년에 걸친 일본군 주둔 기간 동안 6만 명쯤의 티모르 사람들이 굶주림과 강제 노동, 그리고 연합군-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 휘말려 죽었다. 그런데도 도조는 아시아 해방을 위해서였다고? 나치 히틀러가 독일인의 '생활공간' 확대를 말했듯이,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일본군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일본에선 '진출'이라 일컫는다. 문제는 일본의 우경화 흐름이다. '진출'의 정당성을 우기며 궤변을 늘어놓던 도조의 법정 발언록이 (도쿄 재판에서 인도 출신 팔 판사가 '피고인 전원 무죄'를 주장하면서 내놓았던 '반대의견서'와 함께) 21세기 일본 극우의 이념적 근거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글이 길어져, 전범 도조 히데키에 대해선 다음 주에 한 번 더 살펴보려 한다). (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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